붉은 스웨터 / 이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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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91회 작성일 18-05-25 02:56본문
붉은 스웨터 / 이민하
한 올만 당기면 풀어질 듯
입을 막고 있어도 우리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몸속에 둔 실마리를 들키지 않을 것처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에 엮여서
두껍고 따뜻한 촘촘한 사람이 되었지만
손가락이 닿으면 파르르 떨리는
스웨터의 물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손 끝에서 맥박이 섞이고
눈을 가만히 닫고 있으면
물려 입은 옷처럼 타인의 냄새가 난다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활용되고 있었던 걸까
깨끗이 빨아 입어도 낡은 슬픔뿐
어둠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입가에 붙은 미소를 보풀처럼 떼어주며
스웨터보다 한 뼘 더 기어올라서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
검은 손은 내 것이 아닌데
당신은 내게 애원하는 눈빛이다
우리는 실마리를 쥐었다 놓았다
벌거벗은 잠자리까지 파고드는
어둠의 손아귀
바닥에 누워 풀썩거리던
한 사람이 밧줄 더미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가볍고 뜨거운 핏방울이 한 코 한 코 솟구쳤다
어둠의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핏물로 짠 스웨터가 몸속에서 뒤척거렸다
입을 닫아 주어도 잠들지 않았다
* 이민하 :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외 다수
# 감상
온갖 손짓 몸짓으로 스웨터 뜨게질 하는 누이의 옛 모습이 아른거리네
누이가 짜준 스웨터는 낡아서 보풀이 나비처럼 날으며 반들반들 해질
때까지 나에게서 동생으로 동생으로 내려 입던 시절이 있었네
-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 가볍고 뜨거운 핏방울이 한 코 한 코 솟구쳤다
얼켰다 풀렸다 하는 뜨게질 현상이 때로는 망원경 속처럼 때로는 현미경
속처럼 전이 되고 확장 되면서 붉은 스웨터에 대한 내포와 외연이 활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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