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2> 지하에는 껍데기가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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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569회 작성일 18-08-13 11:17본문
지하에는 껍데기가 살아
낮하공
어느샌가 난 깨진 채 걷고 있었다
좁은 난간 위에 유리병을 올려놓는 이 세계의 모서리를
모서리의 내각을 모두 더하면 지하가 되는 이상한 리듬을 타고
아이가 발자국을 먹어치우네
유리병은 흔해빠진 날개를 훔치고 싶네
바람이 돋보기로 꿈을 비추면
누구든 슬픔과 아이를 구분하지 못하네
가슴에 움켜쥐고 있던 끈을 버렸다
모든 바람은 지하로 통하고, 모서리에서는 투사가 필요하니까
틈만 나면 목이 메이는 계절이 생겼다
날개는 지상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에
지하의 발자국은 모래알 뒤에서나 발굴되었다
핏줄이 폭우에 휩쓸려갈 땐
약국에서 달을 물어뜯는 고양이를 사다 길렀다
바람이 절벽을 코앞까지 끌어올 무렵
마지막 끈을 버렸다
난간은 지하에 있소 지하엔 산타가 없소 지하의 발자국엔 날개가 피지 않소 이를테면 내겐 햇빛이 들 만한 창문이 없소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으나 그녀는 내 말을 속속들이 듣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하는 견딜 것, 넘어질 것, 포기할 것 따위로 쌓아올린 탑이다
끈을 모두 버리자 나는 투명한 껍데기가 되었다
배경이 된 사물과 같은 말을 썼고, 가볍게 걷는 만큼 위험해졌다
껍데기를 으스러지게 안고 매일 섹스를 했다(아침은 착상되지 않는다)
비구승처럼 손과 가슴을 태우고 구름을 외웠다(난 행복하다 백 번 말하는 동안 지금 눈물을 마구 흔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지상의 사람이다)
나를 닮은 것들은 모두 같은 리듬으로 깨지면서 죄를 낳았다
기록적인 폭염이 더 견뎌야 할 것마저 강탈해갔다
뾰족하게 치솟는 초고층 빌딩들 높아질수록 더욱 크고 짙어지는 그림자 검은 사각 안에는 깨진 껍데기들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여긴 접근금지구역이라는 듯 바리케이드를 치고 푸른 하늘을 차단하고 나섰다
나이가 들수록 머리 위로 더 많은 발들이 지나다녔다
죽기 딱 알맞은 시즌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댓글목록
최정신님의 댓글
최정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모두가 공감하는
신선한 서술이 독자를 당깁니다
자주 뵙기를 바람합니다.
낮하공님의 댓글의 댓글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부드러운 손으로 맞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머물면서 배우겠습니다.
서피랑님의 댓글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각적인 서술에 감탄합니다,
언어를 다루는 손길이 보통이 아닌 분이네요,
창방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앞으로도 멋진 작품 기대할게요,
낮하공님의 댓글의 댓글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초면이라 프리미엄을 붙여주셨나 봅니다.
두 문을 활짝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피랑님의 댓글
동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진도 9.0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오신 낮하공 검객님 상석으로 모십니다.
지하에 계시다가 이제 첫 그림자를 마을에 펼쳐 말리시니 반갑게 환영합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계절을 누비도록 하시지요.
낮하공님의 댓글의 댓글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푸짐한 레토릭을 섞어서 팔을 벌려주시니
졸시가 몹시 불콰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