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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도시 나주 3일간의 폭염속 역사탐방3-불회사ㆍ나주읍성ㆍ박경중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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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2,551회 작성일 16-08-2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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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 동정문 뒤뜰에서..2016.8.22(월)

폭염속 여름날에 전남 나주 문화재를 찾아 나서다

2016.8.20(토)-22(월)-2박3일 둘이(나주 영산강 황포돛배에서) 1편: 전남 나주 곰탕거리(중식)▶금성관▶목사내아▶나주목문화관▶나주향교 2편: 나주박물관▶반남 고분군▶정렬사▶완사천▶나주역▶영산포구(홍어거리)황포돛배 3편: 불회사▶나주읍성(동정문ㆍ서성문ㆍ남고문ㆍ북망문)▶박경중 가옥▶구 나주역사 3편: 불회사ㆍ나주읍성ㆍ박경중가옥 2016.8.22.월요일 백호 임제 선생 기념관 백호 임제 선생은 조선 명종 4년(1549) 12월 20일 병마절도사인 부친 임진과 모친 남원 윤씨의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호라는 호 외에 겸재, 풍란, 소치라고도 불렸다. 1576년 생원 진사에 합격하여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 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여 명산에 들어가 성운에게 사사했다. 성운 선생은 서경덕, 조식, 토정 이지함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당시 공명심에 불탔던 호남 선비들이 당대의 등용문이던 박순의 문하로 운집할 때, 과학 위주의 글에는 관심이 없었던 호쾌한 백호는 성운을 홀로 찾았다. 그의 나이 26세 가을이었다. 3년을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영모정, 벽루정, 소요정, 창랑정 등 이른바 영산강 8정을 두루 돌아다니며 문우들과 만나 술과 시, 거문고 풍류로 세상 인심을 논했다. 2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7년 전인 1575년 호남에 왜구가 침입하자 백호는 박계현 막하에서 백의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후에 병조판서가 된 박계현이 임제를 평하기를 '금석같은 목소리, 유창한 말솜씨, 노년에 그대 만나 사는 보람 크도다. 시단의 굳센 시운 세상을 압도하니...' 라 하였다. 30세 후 민중 속에 뿌리깊은 서민 의식 표층의 시를 많이 남겼고, 39세로 요절할 때까지 일천 수가 넘는 시를 썼다. 대문호 신흠은 '백호문집' 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컬었고, 또 시에서 그에게 90리나 훨씬 떨어져 양보할 수 밖에 없다" 고 털어 놓았을 정도이다. 백호가 운명하기 직전 남긴 유언에 "나라마다 독립 국가를 자처하나 오직 우리 나라만 중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말이 있다. 유언의 사실 여부를 떠나 마지막 남긴 서러운 말은 민중들의 가슴 속에 '독립심'과 '자주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2006년 11월 17일 (금) 나주신문 예스TV * 귀래정 임붕이 건립한 정자, 나주 영모정 (羅州 永摹亭) * 영모정은 중종 15년, 귀래정 임붕이 건립한 정자로 이 지방 출신의 명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깊은 건물이다. 초기에는 붕의 호를 따 ‘귀래정’이라 불렀으나 명종 10년,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과 1991년에 다시 중건·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한 무고주 5량가이다. 세부양식은 두벌대의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기단 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최근에 다시 그 위에 2m 가량의 원형 장대석 주춧돌을 세웠다. 그 위에는 아랫부분을 잘라버린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보와 장혀, 도리를 결구하였다. 굵은 보를 걸치고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걸치고 판대공과 파련대공을 섞어 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설치하였다. 평면은 온돌방 1칸, 루마루 2칸으로 실이 있는 정자건물이다. * 영모정의 볼거리 * 영모정은 비교적 건립연대가 빠르고, 주위에 400여년 된 팽나무가 많이 있어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또한 이곳 회진에서 출생하여 조선시대 명문장가로 이름난 백호 임제 선생께서 글을 짓고 사람을 사귀었던 곳으로 문화재적 의의가 더욱 깊은 곳이라 하겠다. 현재는 나주임씨 문중종회소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영모정 바로 밑 구릉에「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백호임제선생기념비」 2기가 있다. *다음백과에서 옮김 ♣ 영모정(永慕亭) ♣ ㅡ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0번지ㅡ (귀래정공(歸來亭公)을 위한 정자) 귀래정(歸來亭)공(公) 임붕(1486-1553)은 자(字)충거(충擧), 호(號)귀래정으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승지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고 광주목사 재임중 작고하신 분인데 문학과 덕망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공의 부친 참판공(參判公) 휘(諱) 평(枰)께서 돌아가심에 이자리에서 거려(居廬)를 하시고 이곳에 정자를 세울 뜻을 가젔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체 돌아가시었다. 그때 공의 자제들 중에 맏 아드님인 장수공 휘(諱) 익(益)은 돌아가신 뒤라 정자공 휘(諱) 복(復)이 절도공 휘(諱) 진(晉), 첨지공 휘(諱) 몽(蒙)과 함께 역시 이자리에서 거려를 하며 3년 상기를 마친 다음 드디어 이 정자를 세웠다. 명종 11년(1556년)의 일인데 정자 이름은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영모정(永慕亭)"이라 한 것이다. 원래 건물은 정유재란시(1597년) 소실 되었던 바 광해군 14년(1622년)중건했으며 이후 누차 보수하여 2005년 5월 중건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매년 음력 10월1일 이곳에서 나주임씨 대종중의 삭회(朔會=정기총회)가 열리고 있다. 이정자는 회진 마을을 옆으로 하고 영산강을 굽어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기와 팔작 지붕에 4가(架)3간(間)인데 서편으로 1간은 방 나머지 2간은 대청이다. 여기는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알려져 찾는 문사(文士)들의 발길이 잦았으며 이정자를 두고 읊은 시편들 또한 많이 전한다. 불회사로 오른다. 나주시 다도면 덕룡산 자락에는 불회사가 있다. 서기 366년 창간된 유서깊은 고찰이다. 절 입구의 석장승이 유명하고 대웅전은 보물 문화재다. 절 뒤편으로 동백나무와 비자나무숲이 울울창창하다. 일주문을 지나 절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로는 편백림이 조성돼있다. 비자나무는 300~4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며 높이가 10여m를 훌쩍 넘는다. 비자나무 숲에는 차(茶)나무가 함께 자란다. 비자나무와 차나무는 이곳 스님들은 물론 절을 찾는 속인들을 비롯해 인근 고을 주민들의 약재 공급원이 되고 화재로부터 방화림 역할까지 한다고 한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알려진 초의선사가 불회사에 출가해 차를 달여 마셨다. 인근의 다도(茶道)면이라는 지명은 그래서 생겨났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는 비자나무 아래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찻잎으로 만든다. 이름이 '비로다(比露茶)'다. 1930년대말 나주와 강진, 장흥을 중심으로 청태전과 돈차류를 만들어 가정마다 상비약으로 차처럼 마신게 유래다. 해방 이후 그 맥이 끊어졌으나 이곳 불회사에서 돈차와 벽돌차의 맥을 되살려 오늘날 떡차로 이어지고 있다. 산림청이 올초 불회사 비자나무·차나무 숲을 국가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했다 일주문을 지나 아늑한 숲길을 오르다가 남녀 한쌍의 석장승을 만난다. 나주불회사석장승 (羅州 佛會寺 石長丞) 중요민속문화재 제11호 불회사 입구에 서있는 2기의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하는데 이 장승 역시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수문신상이다. 불회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높은 산을 뒤로한 협곡에 자리잡고 있다. 절 앞 300m 되는 지점의 길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있는 이 장승은 남·녀의 모습으로 구별된다. 남장승은 선이 깊고 뚜렷하며 수염이 표시되었고, 머리 위에서는 상투를 튼 모습을 흉내내었다. 송곳니가 드러나고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있다. 여장승은 남장승에 비해 표정이 온화하고 얕은 선으로 표현되었다. 미소 띤 얼굴에 몸체에는 ‘주장군(周將軍)’―원래 명칭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이란 이름이 있다. 두 장승 모두 크고 둥근 눈에 두리뭉실한 주먹코이다. 얼핏보면 제주도의 돌하루방을 옮겨다 놓은 것 같기도하고 나주운흥사석장승(중요민속자료 제12호)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숙종 45년(1719)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의 무속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상징적인 조형물로서 험상궂은듯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 친근감을 준다. 불회사로 산길을 오르다가 희귀한 큰 나무를 본다. 600년 된 느티나무이다.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음양수인 연리목이다. 마치 바위에 두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처럼 보이고 있는 희귀수목으로 나라의 경사,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성 등을 상징하는 나무로 고려사와 삼국사기에서도 연리목을 기록할 정도로 희귀하고 경사스런 나무로 천년의 세월을 넘어 이곳 나주 다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주 상서로운 일로 보호수로 지정코자 한다고 쓰여있다. 때 맞춰 다람쥐 한쌍이 연리목 밑둥에서 노닐다가 나를 보자 쪼르르 빠르게 도망갔다. 디카를 급히 들이 대어 두마리중 한마리가 내 디카에 들어왔지만 아쉽게도 흔들렸다. 비로천 샘물 한 바가지로 더위와 갈증을 가라 앉힌다. 대웅전이 공사중으로 어수선이다. 극락전 범종각 사찰 울창한 숲에서 산림욕은 절로 된 듯 상쾌한 기분으로 불회사 탐방을 마치고 하산길이다. 홍어거리로 다시와서 영산강변 전망좋은 모텔에 둘째밤 둥지를 정하고 냉면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영산교 산책에 나선다. 해가 서서히 아파트 뒤 서산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하늘에 걸린 붉은 노을이 아름답다. 저녁하늘이 불탄다. 영산강의 아름다운 저녁하늘이다. 저토록 신비로운 영산강의 하늘이 내마음에도 내려 앉았다. 내마음은 온통 황홀감으로 하늘과 하나를 이룬다. 나주기행 중 만난 아름다운 영산강의 저녁이다. 기행 둘쨋저녁시간은 영산교에서 이렇게 황홀히 보냈다. 기행3일째 마지막 날이다. 아침일찍 서둘러 나주읍성부터 둘러보기로 하곤 숙소을 나선다. 달리는 자동차속에서 별모양의 흰꽃을 보고 디카에 담았다. 이름 모르는 꽃이라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 미안했다. 영락없는 별모양의 하얀꽃이다. 흰별꽃, 백성화(白星花)라 이름을 지어본다. 그렇게 정하고 보니 그 꽃에 더욱 애정이 갔다. 어느사이 나주읍성 동문인 동점문에 이른다. 우리보다 먼저 온 중년부부가 둘러보는 중이었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성벽은 잔돌끼움 쌓기방식으로 쌓았다. 동문은 동점문東漸門, 서문은 서성문西城門 남문은 남고문南顧門, 북문은 북망문北望門 동점문 뜰 석류나무에 잘 생긴 고운 석류가 우릴 반기듯 고운자태로 피어 있었다. 감나무에 감이 아직은 여름을 즐기느라 꼬까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을 하지 않군! 나주읍성 서문, 서성문 나주향교 앞에 위치해 있었다. 나주읍성 남문, 남고문(南顧門) 사적 제337호 (전남 나주시 남내동 2-20번지) 나주읍성 4대문 중 가장 많이 사용했던 남고문이다. 일제에 의해 석축만 남겨두고 철거되었지만 1993년에 옛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라한다. 나주읍성 북문, 북망문은 한창 복원 공사중이었다. 박경중 가옥 문화재자료(나주시) 제153호 전라남도 개인한옥 중에서는 가장 큰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1884년에 지어진 초당을 비롯하여 장흥군수를 지낸 박재규선생이 장흥군 관아의 모습을 따라 1920년대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지난 100년간 일체의 개조없이 그 모습을 그대로 보전해오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나주 남파고택 안채 중요민속문화재 제263호. 1900년대 초에 건립된 남파고택은 후손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거주해 오고 있으며 안채, 바깥사랑채, 아래채 등 본디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일자형 주거로 앞뒤가 대칭형인 겹집으로 남부지방 주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전후좌우퇴를 둔 방풍집으로 되어 있다. 이 가옥은 근대 호남 재산가의 주거 및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4,000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옛 문서들을 통해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재산 형성과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손실 과정을 낱낱이 알 수 있다. 이밖에 상과 부채, 1910년대의 종이, 안장과 말치례 등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자료는 우리나라 근대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안채는 1914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1917년에 완공되었다. 건축시기는 상량문에 1934년인 갑술(甲戌)로 되어있으나, 실제시기는 1917년 정사년(丁巳年)으로 오른쪽 처마 끝 암막새에 돋을새김 되어있다. 이 건물은 비교적 큰 규모로 우람하고 장중하면서도 기이하리만큼 단아하고 조화롭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구전에 의하면 장흥 관아 건물을 본 떠 지었다고 한다. 바깥사랑채의 건립시기는 1932년으로, 처마에는 추사(秋史)김정희(1786∼1856)가 쓴 현판이 있고 방에는 창암(蒼巖)이상만(1770∼1845)의 현판이 있다. 이 가옥은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53호 나주 박경중가옥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17일 중요민속자료 제263호로 승격되었으며 나주 남파고택으로 문화재명이 정정되었다. *다음백과에서 옮김 박경중씨의 6대조 어르신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초당(草堂)’이다. 초당은 짚이나 억새로 지붕을 이고 목재와 토벽으로 지은 전통민가를 뜻한다. 박경중가옥 뒷마당, 북쪽에 위치한 초당은 초가삼간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전후 툇집으로 방2칸, 마루1칸, 부엌으로 구성된다. 초당에는 여전히 전기를 놓고 있지 않으며 불을 켤 때는 호롱불 내지 촛불을 이용한다. 난방 역시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는 옛 방식 그대로이다. 6대조 어른이 기거하셨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색색의 채송화꽃이 무리지어 초당앞에 아기자기 정겹게 피어 있었다. 대청마루 뒤편에 있는 어른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한 칸(間)크기의 돌확이다. 언뜻 보면 옛날 사람들이 목욕을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고택에서 상당한 역사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물건이다. 6대조께서 머물던 ‘초당’과 집터의 기운을 잡아준 ‘돌확’ 돌확은 보통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를 의미하는데 자연석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들거나 그러한 형태로 구워내기도 한다. 옛날에는 일반적인 생활도구로 많이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박경중 가옥에는 오래된 작은 돌확 등이 여전히 안채 마당에 놓여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앞서 얘기한 어른이 목욕을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인공적인 돌확까지 있어 그 용도와 크기에 더욱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만한 크기의 돌확을 제작한 연유는 이렇다고 한다. 4대조인 남파 박재규선생이 안채를 먼저 짓고 기거할 무렵 집안의 불운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바로 남파선생의 손자 2분이 차례로 숨을 거두는 우환이 겹친 것이다. 그 원인을 고심하던 중 집터의 기운이 너무 센 것이라 여기고 안채의 상량문을 다시 고치었고 지금의 돌확을 만들어 그 기운을 누르고자 한 것이다. 돌확을 옮기기 위해 안채로 통하는 협문이 있던 자리를 헐고 들여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민가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박경중 가옥의 돌확은 다른 용도로도 용이하게 사용되었다. 일종의 우수처리시설이자 마을 일대의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로도 사용 되었다고 한다. 처마의 빗물을 받아 고택 곳곳의 마당과 정원에 물을 주는 용도로도 사용되었고 혹시나 모를 화재에도 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 돌확에 물이 차게 되는데 만약 돌확에 고인 물이 차고 넘치면 나주 일대의 강우량이 60mm 이상이라 여기고 수해에 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주변 농가의 농사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데 한 마디로 ‘강우주의보’의 기능까지도 돌확이 수행한 것이다. 안채 툇마루와 누마루 가옥주 박경중선생이 마침 계셔서 환영해 주어 대청마루에서 반갑게 뵙게 되었다. 안 주인의 차대접도 받으며 박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눌 수 있었다. 현재 박경중선생 본인이 9대손이시라면서 계속 대물림으로 지금까지 보존해 왔다고 하였다. 주인장 박경중선생은 나주문화원장과 전남도의원을 지내셨고, 안주인 강정숙씨는 200년동안 나주에서 터를 이어온 밀양박씨 종가의 종부로 어린이집 원장이면서 시의원을 지내기도 했고, 시인으로 등단도 하신 분이시다. 또 고택의 뛰어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온전하게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상인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을 받기도 했다 한다. 시렁위에 크고 작은 상들이 즐비하다. 모시는 조상이 18위인데 상마다 모시는 조상이 다르다고. 사도세자도 능히 들어 감직한 뒤주와 화초장, 서랍장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집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대청마루. 쌀이 열가마 반이나 들어가는 큰 뒤주와 뒤주가 너무 커 그냥 쌀을 꺼낼 수 없어 딛고 올라설 때 사용했던 발받침에서 집안의 큰 살림규모를 알 수 있다. 장롱들은 조선시대 유명했던 나주목물로 나주고을내 이름을 날렸던 박소목방과 이소목방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나무로 만든 2인용 도시락 찬합을 설명중이시다. 방명록에 사인를 마치고 대문을 나와 마지막 일정으로 구 나주역사로 향한다. 구 나주역사 구 나주역사를 마지막으로 나주 2박3일 기행을 모두 마친다.
사진편집및제작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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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안박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안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찬란한빛`김영희* 旅行作家님!!!
"燦爛한빛`김영희"任! 올晩의,댓글人事`입니다..
 千年古都-"羅州`邑城"의 探訪記를,感動으로 보며..
 情多운 두分의 貌濕도,방가이..참말로,부럽습니다..
 늘常 두分의 旅行記를 즐感하며,感謝`드립니다如!
"김영희"作家님! 手苦하심에,感謝드리며,安寧`要!^*^

찬란한빛e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박사님 오셨군요. 환영과 함께 반깁니다.
이렇게 두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다닐 수 있음에
여행중에도 두손모아 감사드리며 다닌다지요.
늘 잘 보아주시고 그리고 격려를 주심에
그 힘도 큰 에너지로 작용하여 이렇게 여행을 즐길 수 있지 않나
그런생각이 듭니다.
이젠 더위도 한풀 꺾인 듯,
가마솥 찜통더위에서 한발 물러나니 견딜만 하네요.
가을마중 채비를 서서히 해얄 것 같습니다.
머물러 주신 고운정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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