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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전 중국기행에서 백두산 천지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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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1,904회 작성일 17-03-2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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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6.22.백두산 천지로 내려 온 선녀의 은은한 미소 백두산 천지의 감동.. 폭우가 쏟아져 백두산 천지까지 찝차를 타고 올라가니 비는 그쳤지만 하늘엔 시커먼 구름이 바람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앗, 해가!" 먹구름속에서 햇님이 쏘옥 얼굴을 내보이며 천지를 밝히고 있지 않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이 "우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먹구름이 잠시 물러나 10분씩이나 우리에게 햇님을 선사해 주었다. 가이드가 구름이 다시 몰려오니 서둘러 사진을 찍으라며 재촉하기에 급히 몇장면을 담는 중 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시 폭우속에 찝차를 타고 백두산 천지를 내려왔다. 천지에서 아주 잠시지만 햇님을 만난 행운을 안아 이처럼 아름다운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우리 겨레의 숨결을 찾아 떠난 중국 일본 기행
장백폭포에서 1996.6.19~7.1 (12박13일) (중국 9일, 일본 4일) 두산연강재단에서 주관한 전국에서 선발된 제8회 교사해외역사학술시찰단 제3진 일행기념사진이다. "어, 내가 여기 있네!" 하시며 반갑게 그때의 감동을 다시 안을 수 있는 일행 한분이라도 오셔서 보신다면 좋겠단 생각도 하면서 이 게시물을 올린다. 모습이 많이 담겨 쑥스럽지만 보관용을 겸해 이곳에도 선보인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거슬러 올라가 19년전 평생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때였다. 두산그룹 연강재단에서 전국교육청에 의뢰해 주관하는 100년대계 교육사업에 발탁되어 다녀오게 된 내겐 꿈 같았던 설레임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땐 직장일에 매여 여행기록은 생각도 않던 때었고, 지금같은 여행기 위주의 사진이 아니어서 사진마다 모습이 들어가 있어 망설이다 망설이다 오픈이다.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그때 기록을 사진이나마 보기좋게 정리를 해얄텐데.. 하던 차에 19년전 첫 해외여행 사진을 이곳에 정리하면서 그때 못다한 공부를, 또한 행여 잊었던 우리역사를 인터넷자료를 빌어 세세히 살피며 되짚어보는 기회를 가지면서 그 옛적 기억을 짜내느라 여러날을 이일에 몰두하면서 머리 쥐날 정도로 몰입, 제작한 개인 보관용 여행기록물이다. 중국 9일, 일본 4일, 13일간의 여정에 수많은 유적지와 관광지이야기가 넘쳐 나지만 19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보니 흔적을 남기지 않아 잊은 것 투성이다. 이 게시물을 만드느라 많이 유식해졌고, 더 유식해지고자 다녀 온 길따라 중국기행을 다시 꿈꾼다. 전국에서 모인 일행 모두가 찐한 감동의 여정이었다. 아래 글은 여행을 다녀와 일행들의 여행기를 엮은 연강재단의 출판물 1996년도 '가슴으로 느낀 겨레의 숨결' 이란 책자(비매품)에 실린 나의 글이다. 칠흑속의 감동 꿈결같은 13일간의 중국.일본의 역사학술시찰에서 나는 시종일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여정에 임하였다. 다녀와서는 특히 조상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옛 고구려 땅 집안시 아름다운 고분벽화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적을 찾으며 더 심도있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집안시는 고구려 전기와 중기때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한 곳이어서 1만2천여 기나 되는 고분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이중 1만1천2백 기가 통구 일대에 밀집해 있어 통구 고묘군이라 부르는데, 고구려 벽화가 있는 고분이 무려 20여기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교과서에서 배운 무용총, 각저총, 그리고 오회분 5호묘의 벽화를 둘러 보았다. 쌍분처럼 나란히 이웃해 있는 무용총과 각저총 두 고분은 집안시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여산의 남쪽 기슭에 고즈넉이 자리하였는데, 주변의 옥수수밭과 사과밭이 두 고분을 감싸고 있었다. 박물관 관계자가 용접되어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바깥으로부터 전선을 연결하여 들여온 백열전등으로 칠흑같은 고분속을 밝혀 주었다. 바깥은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한여름 날씨였지만, 고분속은 온몸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우리 일행은 허리를 굽혀 긴 고분속을 더듬어 현실 입구로 들어갔다. 충격과 감동의 현장이었다. 모든 벽면과 천장이 온통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어 고분 자체가 거대한 미술관처럼 우주처럼 느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1천5백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광채를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한 결로현상에도 불구하고 박락(剝落)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 조상들의 안료제조와 설채(設彩) 기법에 뛰어난 과학적 기술이 뒷받침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씨름 그림 때문에 이름 붙여진 각저총은 축조방식이나 죽은 이의 생전생활을 주제로 한 점이나 문양 등, 무용총과 흡사하나 벽화 내용은 적고 간결하였다. 천장은 화려한 불꽃 문양과 인동 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문양사이로 삼족오(三足烏)가 있는 해와 별자리 모양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현실 동쪽 벽 씨름도는 역사들의 씨름장면과 정자모양의 집이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나무 위에는 네마리의 검은 새가 앉아 있고, 그 밑에는 우람한 체격의 두 젊은이가 속옷만 걸치고 허리를 구부린 채 서로 몸을 맞대고 있었다. 한 사람은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는데, 다분히 서역적이었다. 주인공의 실내생활을 묘사한 북쪽 벽은 화려한 장막이 쳐진 실내에서 두 귀부인이 음식 놓인 탁자를 각각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귀족들의 풍요로운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림이었다. 무용총의 동쪽 벽에 그려진 무용도에는 두사람의 남자와 세사람의 여자로 구성된 무용단이 있고, 아래쪽에 일곱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있었다. 가무를 즐기는 고구려인들의 흥겨운 율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서쪽벽의 수렵도는 무용도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벽화였다. 넓은 평원에서 네명의 기마무사가 호랑이, 사슴, 토기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고구려 무사의 기백과 긴장된 움직임이 그림에 가득하였다. 또 소가 끄는 수레 그림에서는 바퀴의 크기나 치장이 상당히 화려하게 느껴졌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소의 눈망울이 살아 있는 듯 생기가 있었다. 특히 천장의 수탉그림은 탁월한 묘사력과 넘치는 기운으로 우리나라 고대 닭 그림 중 가장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각저총과 무용총 두 고분을 둘러보니, 무덤 구조라든가 천장형태, 벽화내용, 화풍의 발달정도 등 모든 면에서 비슷했다. 집안에 있는 20기의 고분 중 5호묘는 중국 공안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람했다. 일반관람의 허용으로 결로현상이 심해 벽화에 흘러내린 물로 얼룩진 부분도 있었지만 청룡,백호,주작, 현무 등의 사신과 여러문양들이 힘찬 필치로 짜임새 있게 그려져 있는 훌륭한 벽화였다. 보리수나무를 가운데 두고 해의 신과 달의 신이 하나의 화면에 그려진 하얀 옷의 일월신, 제륜신, 야철신, 그리고 오른손에 벼 이삭을 들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흰뿔과 푸른 눈을 한, 소머리에 사람의 형체를 한 농사신 등, 인류문명 발달에 기여한 신들이 그려져 있었다. 천장은 삼각형 받침돌로 네벽의 모서리를 차츰 좁혀 나간 말각 조정식이며, 바닥에는 피장자와 그 양쪽에 각각 부인 및 첩의 관을 놓았던 대가 놓여 있었다. 남쪽을 향한 현실 입구에는 두 날개를 부채 모양으로 펼쳐 들고 붉은 색과 짙은 갈색으로 채색된 긴 꼬리를 힘있게 위로 올린 두마리의 주작이 서로 대칭된 모습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서쪽벽에는 백호도, 북쪽벽에는 현무도가 있었는데, 문양이 벽면을 가득 채운 가운데 머리 돌린 거북이 자의 몸을 칭칭 감은 뱀과 마주보고 있었고, 동쪽벽에는 흰색 바탕의 붉은 눈을 한 청룡의 머리와 각종 문양들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무용총과 각저총 같은 5세기경의 고분벽화들은 그 시대의 풍속을 잘 전하면서 다분이 즉흥적인 필치 속에 고졸한 멋을 풍겼고, 5호묘와 같은 7세기경의 벽화는 사신 그림을 통해 신앙과 정신세계를 대변해 주면서 치밀하게 양식화된 벽화 기법을 보여 주었다. 고구려는 한족이나 북방 민족들과 끊임없이 대결해야 했던 생활탓인지 힘과 연관된 수렵, 전투,씨름 등의 벽화들이 종종 보였으며, 이 벽화들은 웅혼하고 힘찬 고구려인의 기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벽화중 인물 풍속도는 서사적이고 설명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주인공의 생애와 연관이 깊었다. 구성면에서는 정확하게 맞물리듯 완벽에 가깝도록 짜여져 있어, 세 고분 벽화는 입체적 공간속에 살아서 꿈틀대는 듯 돋보였다. 고구려인의 혼이 서려있는 세 고분 벽화를 둘러 보면서 조상들의 예술성과 뛰어난 과학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이제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잠시 잊혀졌던 대륙에의 꿈을 다시 지필 수 있는 소중한 불씨라고 생각된다. 이번 역사학술시찰을 계기로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주어, 고구려 옛 땅을 다시 회복하고 조상들의 우수한 예술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갈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쏟을 것을 다짐하며 돌아왔다. 1996년 7월. 김영희씀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 중국 근대정치의 중심 무대, 베이징 중심에 위치한 세계 최대 광장 ▶ 지하철 : 1호선 天安??(티엔안먼똥)역, 天安?西(티엔안먼시)역 하차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중국사람들의 드넓은 기개를 대표하는 명소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고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췄다. 그래서 지금 전체 면적이 44만㎡이며, 동시에 백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중의 하나로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 천안문광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는 해가 뜨는 새벽에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이라고 한다. 행진곡과 함께 군인들이 정렬하여 나타나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는데, 이 의식에 걸리는 시간만 거의 30분 정도이고, 국기 게양시간과 강하 시간은 매번 조금씩 다르다는데, 그 이유는 넓은 중국 대륙에서 해가 뜨고 지는 자리와 천안문 광장의 지평선이 서로 일치할 때를 계산하여 정하기 때문이라 한다. 팔도에서 모인 칠공주.. 천안문 광장 모택동 사진을 배경으로 쭈욱~1열횡대로 서서 찰칵! 천안문 안으로 들면 자금성이다. 자금성을 배경으로 찰칵! 만리장성 오르는 입구에서 만리장성에서 만리장성 거센바람이 디자인해 준 헤어스타일 만리장성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나라별로 부분적으로 쌓았던 것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이 공사는 10년 동안 이어졌으며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들이 징발되어야했다. 그 후에도 역대 왕조들이 개수하였고 명나라 때 와서는 200여 년 동안 18차례나 수축되어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명나라때 지어진 것으로 '팔당령'. '모전욕', '사마대'가 개방되어 있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6,700km에 달하고 이것을 쭉 늘어드리면 747비행기로 7시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건축물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단연 '팔달령'인데 이곳은 길이 잘 닦여져 있고 복원상태도 매우 잘 되어 있어서다. 그래서 '사통팔달'이란 말도 이곳 '팔달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장성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모전욕'과 '사마대'도 점점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의 가장 경탄해 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강줄기처럼 이어진 장성의 웅장함이다. 통로의 넓이는 5.7~6.5m, 높이는 8.5m로 되어 있어 예전에 말 몇필이 나란히 이동하기에 편리하게 제작되었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110m마다 설치되어 있다. 또 벽돌 하나하나를 찹살풀로 이겨 쌓았기 때문에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이렇게 견고한 만리장성도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있다. 생태환경의 악화와 자연 풍화, 사막화의 진행,인공적인 파괴등의 원인 으로 3분의 2가량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거나 궤멸 중에 있다고 한다. 또 문화혁명 때는 농부들이 집을 수리하고 가축우리를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의 돌을 훔쳐가 많이 훼손되었다 한다. 세계인들은 이런 만리장성을 보고자 한해에도 수백만명이 몰려든다. 지금은 중국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원래의 목적에는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출처:http://blog.naver.com/2009mjsky/20067586035 이도백하에 있는 천지호텔 천지로 오르는 입구..찝차를 기다리는 중 서울일행과 한컷을.. 백두산 천지 함경북도 무산군과 혜산군 및 중국 동북 지방 길림성(吉林省)에 걸쳐 있으며,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51호(지리 부문)로 지정되어 있다. 일명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하는데.. 화구벽(火口壁)에 오봉(五峯)이 병풍처럼 빙 둘러서 있고, 오색으로 물든 화구벽이 거꾸로 비치고 있는 검푸른 물속에서는 금방이라도 용왕이 위엄을 부리면서 나타날 것만 같다. 『북새기략(北塞記略)』에는 “백두산마루가 꺼져 대택(大澤)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큰 바다와 서로 통해있는 눈’이란 뜻으로 해안(海眼)이라고도 하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비롯한 고지도 및 문헌에는 대지(大池)라고 되어 있다. 1764년(영조 40) 박종(朴琮)은 백두산을 탐승한 기행문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에서 “석봉이 늘어선 것이 병풍을 두른 것 같고 높이 솟은 것이 군자와 같은데, 그 복판에 큰 못이 고여 있다. 움푹 꺼져 들어가기를 천길이나 되며 물이 독에 있는 것 같아서 엎드려 보면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검푸르게 깊은 것이 잴 수 없으며 땅 구멍에 통할 것만 같다. 얼음이 수면을 덮었는데 열린 곳은 겨우 4분의 1이며 빛은 푸른 유리와 같고, 석문(石紋)이 영롱하여 사면의 그림자가 비치며 얼음이 엷어서 거울 같다.”고 천지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개국설화가 서린 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 해발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백두대간의 시발점으로 한민족의 성지와도 같은 영산이다.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불린다. 백두산은 1년중 8개월 이상 눈으로 덮힌 정상과 화산활동으로 생긴 흰색의 부석이(浮石: 물 위로 반쯤 드러나서,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 얹혀 있는 모습으로 마치 흰색의 머리와도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 천지는 화산분화구로 물이 담겨진 호수이며 송화강, 두만강, 압록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호수의 둘레가 13.1km, 남북의 길이는 4.85km, 동서의 길이는 3.35km,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이 380여m가 된다고 한다. 원형을 띠고 있으며 전체 면적이 10km 평균 수심이 204m 정도이다. 천지는 옛부터 안개가 많고 1년중 맑은 날이 거의 없다. 천지를 둘러싸고 백두산의 16개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천지의 물이 흘러 장백폭포와 온천을 형성한다. 하늘은 단 10분간의 촬영타임만을 주곤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장백폭포 장백폭포는 양강도 삼지연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백두산에 있는 장대한 폭포. 높이 68m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큰 폭포로 알려져 있으며 비룡폭포라고도 부른다. 16개의 산봉우리가 천지 기슭을 따라 병풍 모양으로 천지의 삼면을 둘러 싸고 있다. 북쪽의 트여진 곳으로 물이 흐르며 물은 1,250m까지 흘러 내리며 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가파른 지형의 영향으로 물살이 빨라서 90도 수직으로 암벽을 때리며 떨어진다. 떨어진 물은 송화강으로 유입된다. 폭포 옆에는 천지를 향하는 계단이 있지만 출입이 금지되는 경우도 있다. 백두산에는 비룡폭포 이외에 백하 폭포, 동천 폭포 등이 있다. 북방의 모든 폭포는 봄에서 가을까지 물이 있어 장관을 이루지만 겨울이면 물이 언다. 장백폭포만은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흘러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천단공원 기년전(祈年殿) 천단은 명,청시대에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 오공의 풍작을 기원하던 곳이다. 수려한 외양과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못을 사용하지 않은 건축물의 대표적인 것으로 뛰어난 건축수준을 자랑한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것은 황제의 연례행사였고,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고대 규모로는 가장 큰 제단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대지면적은 약 273만 ㎡로 황궁인 자금성의 네 배이다. 1961년 국무원에서는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를 했고,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명13릉(明十三陵).. 중국 북경 북쪽 약 40km 지점에 있는 창평구(昌平縣) 천수산 아래에 조성된 명(明)나라 때 13제(帝)의 능묘군이다. 그밖에 황후 23명, 태자 2명, 소실 30명 등의 묘가 있다. 영락제 이후의 황제 13대의 능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통칭되고 있다. 이 중 정릉은 발굴되어 내부 지하 궁전도 공개되고, 명십삼릉은 난징의 명효릉과 함께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명나라에는 총 16명의 황제가 있으나, 13개의 능묘만 있는데, 3기의 능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명조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은 도읍을 난징(南京)에 건설했는데, 그의 사후에 난징의 자금산(紫金山)에 있는 명효릉(明孝陵)에 주원장과 황후 마씨(马氏)의 합장릉묘로 장사를 치렀다. 주원장의 장손자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은 연왕 주체에게 정난지변을 통해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에 능묘가 없다. 대종 경태제 주기옥도 황제였으나 폐위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경태릉(景泰陵)으로 불렸으며, 현재 베이징 근처에 묻혀 있다. 중국의 주요 문화보호지역으로 지정돼 개방하는 곳은 명나라 3대 황제와 황후를 합장한 장릉(長陵), 13대 황제와 2명의 황후가 함께 묻힌 정릉(定陵), 그리고 목종 융경제의 소릉(昭陵) 뿐이다. 명13릉은 3대 성조 영락제(永樂帝, 1402~1424)의 장릉(長陵)을 중심으로, 이를 둘러싸듯이 4대 인종 홍희제(洪熙帝 1424∼1425)의 헌릉(獻陵), 5대 선종 선덕제(宣德帝, 1425~1435)의 경릉(景陵), 6대와 8대를 지내 영종 정통제(正統帝 1435~1449)와 천순제(天順帝 1457~1464)의 유릉(裕陵), 8대 헌종 성화제(成化帝, 1464~1487)의 무릉(茂陵), 9대 효종 홍치제(弘治帝, 1487~1504)의 태릉(泰陵), 10대 무종 정덕제(正德帝, 1506~1521)의 강릉(康陵), 11대 세종 가정제(嘉靖帝, 1521~1566)의 영릉(永陵), 12대 목종 융경제(隆慶帝, 1566~1572)의 소릉(昭陵), 13대 신종 막력제(万曆帝, 1572~1620)의 정릉(定陵), 14대 광종 태창제(泰昌帝, 1620)의 경릉(慶陵), 15대 희종 천계제(天啓帝, 1620~1627)의 덕릉(德陵), 16대 의종 숭정제(崇禎帝, 1627∼1644)의 사릉(思陵) 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능은 장릉으로, 남쪽 끝의 백석패방(白石牌坊)에서 능문(陵門)까지 7km에 이르는 길에는 거대한 석인(石人)과 석수(石獸)가 서 있다. 서태후의 여름별장 이화원 필자 뒤로 이화원 돌배가 보인다. 청나라 말기(1895년) 서태후가 3천만 냥의 해군경비를 유용해서 개축한 이화원의 돌로 만든 배, 이화원은 인공호수인 곤명호반에 자리잡은 호화스런 건축물로, 훗날 청일전쟁에서 패한 원인인 사치와 부패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화원(頤和園) 이화원은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중국 황실의 여름 별궁이자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으로 서태후의 여름별장이라고 불리운다. 자연 풍경을 그대로 이용한 정원에 인공 건축물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중국 조경 예술의 걸작품으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화원은 총면적이 2.9k㎡에 이르며 거대한 인공호수와 60m 높이의 인공산을 중심으로 각종 전각과 사원, 회랑 등 3000여 칸의 전통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다. 인공호수 인 쿤밍호는 총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면적이며, 항저우의 시호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서태후 서태후는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고 후에는 제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로 되었고 제8대 동치황제의 생모로 되었고 제9대 광서황제의 이모로 되었던 것이다. 제7대 함풍황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와 낳은 아들이었다. 함풍황제가 죽은후 서태후가 낳은 6살난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그리하여 28세부터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을 통치한 시간이 거의 48년이나 된다. 서태후의 이름은 나라씨였는데 황제의 황후가 동쪽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서태후는 극히 부와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짝은 빵)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사치꾼이었고, 또한 아주 거짓투성이었는데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황제의 아버지는 광서황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정상적 사람이 하루에 머리카락 50개 빠지는건 정상)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는데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 항주 영은사(灵隱寺 : 링인쓰) 석굴앞에서.. 영은사는 동진(東晉) 함화 원년인 서기 326년 인도의 승려 혜리 스님이 항주에 왔다가 비래봉(飛來峰)의 산세가 매우 신비롭고 인도의 영취산과 비슷한지라 여기에 터를 닦고 지은 절이다. 신선의 혼이 깃들만한 수려한 곳이란 뜻의 ‘선령소은(仙灵所隱)’이란 말에서 영은사라는 절이름이 유래한다. 소림사보다 180년이 앞선 건축이다. 절 입구에서 천왕문까지 계곡을 낀 숲길을 걸어 오르는데 왼쪽 바위벽에 10세기에서 14세기까지 새긴 338위의 마애불이 볼만하다. 군데군데 석굴도 있다. 좌측에 계신분이 前 두산건설 박건동 부사장님 당시엔 이사님이셨구요. 참 즐겁게 해주신 분이셨습니다. 중국 항주의 서쪽에 있는 서호에서 일행들이 유람선을 즐긴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소영주,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는 아름다운 호수다. 호수최대의 관광지로 매 계절마다 다른모습을 보여주는 호수로써 서호십경이라는 절경으로도 유명하다. 연길시 신흥소학교방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해맑은 어린이들과 기념촬영 칠판에 쓰여진 좋은글을 좌측부터 두편 옮긴다. 망신할가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패는 하지 않지만 영원히 승리자로 될 수 없다. 21세기 주인으로.. 동무들, 세월은 류수같이 흘러 어느덧 20세기가 100년동안 차지하고 있던 <왕위>를 21세기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습니다. 21세기는 지식의 시대입니다. 자, 우리 다같이 21세기의 당당한 주인으로, 문명한 주인으로 되기 위해 노력분투합시다. 압록강 유람선 선착장으로.. 압록강에서 유람선 타기전 일행들과 기념촬영 압록강 유람선에서 바라 본 강 건너 북한풍경 압록강가에서.. 중국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 윤동주 기념관에서..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윤동주 대성중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행동했던 무대인 중국 연길시 용정에 있는 학교로 윤동주시인의 출신학교로 많이 알려져 있다. 윤동주시인이 이 학교를 다녔을때는 '대성중학교' 라는 이름이었지만 현재는 '용정(룡정)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용정중학교는 옛 대성중학교 터에 세워진 조선족 학교로, 1946년에 광명중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등 용정 지역의 6개 학교가 통폐합하여 세워진 학교이다. 윤동주기념관에서 윤동주 사진모습과 해설가의 모습을.. 기념관내에서 윤동주시인을 사진으로 만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지접대실(舊址接待室)앞에서 金九主席 (1876.8-1949.6) 1996년 서울지역 일행분 기념촬영.. 고구려 광개토왕비(高句麗 廣開土王碑)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길림성 집안시에서 동북으로 3.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비문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여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훈적(勳籍)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집안은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400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 그래서 집안 시 주위로 유적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왕 중의 왕이었던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비는 광개토대왕이 죽고 2년 뒤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중국 땅 집안(集安)에 자리하고 있다. 18세에 왕의자리에 올라 39세 짧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왕의 이름은 담덕이었고 고국양왕의 아들이었다.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 호태왕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광개토호태왕비(호태왕비)는 높이가 6.4미터의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1,775자의 글자를 새겼는데 그 중 1,590자가 판독 가능하다고 한다.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광개토대왕 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청나라가 만주의 봉금을 해제한 후 발견되었는데, 초천부 라는 농민이 팔기 위해 탁본 을 뜨면서 보다 선명하게 뜨기 위해 쇠똥을 발라 불로 이끼를 태우면서 비석에 금이간 모습인데 근래 표면을 반듯하게 하느라 석회를 바르기도 했다 한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으로 동북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다. 장수왕은 광개토태왕이 죽고 나서 2년 후 부왕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비에는 광개토태왕의 업적 뿐 아니라 고구려의 기원, 통치시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장군총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에 있는 고구려의 석릉(石陵)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중국측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으나 고분의 유품이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들 가운데 가장 그 형태가 아름다워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린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1000여 개의 돌이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모습이다.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군총 옆쪽으로 첩의 무덤이라 추측되는 작은 무덤도 하나..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측하고 있는 태왕릉에서 광개토대왕릉(集安廣開土大王陵) 중국 길림성(吉林省:지린성)집안(集安:지안) 태왕릉(太王陵:타이왕링) 묘상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태왕릉이시어, 산악과 같이 평안하소서> 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다. 광개토대왕비를 중심으로 동북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장군총이 있고, 서남쪽 200미터 지점에 태왕릉이 있다. 장군총, 광개토왕비, 태왕릉이 서남쪽으로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태왕릉. 1996년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만해도 중국정부의 관리소홀로 부서진 채 방치된 상태였고 입구철문은 용접으로 폐쇄시켜 일반관람 은 할 수 없었다. 들어가는 입구도 정비가 안된 좁은 흙길이었다. 우리사찰단은 중국관계자가 용접을 뜯어주어 관람할 수 있었고 관람후 다시 용접을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정비를 통해 제법 무덤처럼 보이며 일반관람도 허용이 되어 관광객들이 많이 다녀온 둣하다. 본래 모습은 장군총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고한다. 거대한 받침돌(보호석)이 있는 것도 장군총과 같다. 본래 20개였는데 지금은 13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밑변의 길이가 장군총의 두 배가 넘는 66m로 규모가 훨씬 큰 릉이다. 오랜세월동안 도굴 훼손되고 무너져서 외형적으론 볼품없이 어수선하지만 규모만큼은 고구려당시의 위용을 상기시키는데 충분했다. 잘 정비된 입구..인터넷에서 사진옮김 중국 정부의 무성의한 관리로 태왕릉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용접을 뜯어주어 들어간 당시 태왕릉 입구에서 일행과 둘이 찰칵! 국내성 일대의 무덤떼를 통틀어 [통구 고분군]이라고 하며, 이 곳에 거의 대부분인 12,000여기의 무덤이 몰려 있다. [통구 고분군]은 또 다시 지역에 따라 [우산하 고분군],[산성하 고분군], [만보정 고분군],[마선구 고분군]등 6개의 거대 고분군으로 나뉘어진다. 이 중 [우산하 고분군]이 통구 고분군중에서 가장 규모가 커 모두 3,904기의 무덤이 있다. 산성하 고분군은 환도 산성아래 1,582기의 무덤군이다.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내 동강유역에는 고구려 고분의 백미라 할 수있는 거대하고 중요한 귀족 무덤이 100여개 모여 있는데, 특별히 지정해 [동구고묘군(洞溝古墓群)]이라 부른다. 우리에겐 익숙한 장군총(장수왕릉), 광개토태왕릉, 천추릉(고국양왕릉)등 왕릉이나, 무용총 각저총 사신총 오회분묘(五盔坟墓)등 벽화무덤들이 다 여기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데 이 곳 유적과 유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출처:사이고성 다음카페에서 무용총,각저총,쌍용총,오회분5호묘 속 전체가 빈틈없이 채워진 벽화를 실제로 보면서 하나의 우주를 보는 것 같았다. 무용총 무용도(1910년대 사진) 춤과 음악이 있는 연회가 벌어졌다. 한쪽 뜰에서는 남녀 혼성의 춤사위가 벌어졌다. 고구려 인들의 남녀 의상과 가무를 즐겼다는 고구려인들의 멋스런 풍류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무용총 무용도이다. 무용총 무용도의 현재 사진(화보에서) 무용총은 벽면에 회를 여러 차례 발라 바탕을 평평하게 만든 후 벽화를 그렸다. 이런 경우 회벽에 안료가 쉽게 스며들어 제작에는 용이하나 문제는 습기에 약해 외부와의 온도차로 습기가 차면 회벽이 떨어나가는 박락(剝落)현상이 심하다. 무용총은 개봉후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이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많이 훼손되었다. 각저총 씨름도(1910년대 사진) 사진의 왼편에는 비껴 자란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옆에서 두 장정이 쌑바를 잡고 씨름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빞고 구부정한 자세로 심판을 보고 있으며 나무가지 위의 새들도 목을 빼고 씨름을 구경하고 있다. 이 한폭의 벽화를 통해 우리의 전통경기인 씨름이 이미 고구려때에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각저총 씨름도의 현재 사진(화보에서) 씨름도의 현재 사진을 보면 역시 벽화가 많이 훼손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당국이 녹슨 철문에 자물통 채워 출입을 막아놓기는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회손 상태가 더해가고 있다. 더구나 보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쉽게 미칠 수 없은 만주땅에 있기에 더욱 안타깝다. 글 사진 출처:http://blog.daum.net/jim-blog/4978551 5호묘의 무덤방은 4.7평으로 제법 넓은 편으로 네벽에는 거대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이 사신도가 벽화의 주제를 이루는데 동쪽 벽에는 날아오르는 청룡(靑龍)을, 서쪽벽에는 백호(白虎)를, 남쪽에는 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주작(朱雀), 북쪽에는 현무(玄武)로 거북과 뱀이 서로 휘감고 얽혀있다. 두층으로 된 삼각고임에는 여러 신들을 포함한 하늘세계를 그리고 있다. 널방의 천장을 받치고 있는 사방의 거대한 화강암 위로 신들의 이야기가 조형화 되어 있는 것이다. 삼각고임 1단에는 해와 달의 신, 수레바퀴제조신과 씨뿌리는 하늘나라 사람, 소머리신(神農)과 불의 신, 하늘을 나는 신선 등의 그림이, 2단에는 용을 타고 비파 거문고 피리 장고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하늘나라 사람들이 그려져 신과 사람을 한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통구사신총과 마찬가지로 6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널길 동벽에는 연곷 좌대에 반쯤 무릎을 꿇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수문장의 모습이 보인다. 그 역시 널방 네벽에 그려진 사신들과 함께 무덤 주인공의 영혼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글:다음블로그 '계림' 오회분 5호묘앞 꽃밭에 피어난 1996년 6월 양귀비꽃 양귀비꽃밭에서 포즈를 취하니 양귀비보다 더 고운 두 인간의 꽃..하하하 광개토대왕비에서 북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릉이 있는데, 그 무덤 안쪽으로 태왕향 조선족 소학교건물이 위치해 있다. 집안시 태왕향조선족소학교는 원래 학생이 백명도 넘는 학교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 20명에 선생 여섯을 가진 복식교육을 하는 학교로 되었다. 그나마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우리말과 글의 실용성과 위상이 높아지면서 조선족학생 수가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 향(鄕)에 사는 70여호 조선족들은 아이들을 예전에는 한족학교에 보냈었다는 것이다. 출처:2000.11.01 인터넷 중앙일보 뉴스에서. 復原記 琵岩山<一松亭>은 原來 亭子모양의 한그루 소나무로서 龍井八景의 하나였다. 이 소나무는 日帝에 의하여 1938년에 죽었다고 전해왔다. 龍井市人民政府에서는 한국 卞景발局長, 김재천총재, 李承來사장의 후원으로 1991년 3월12일 소나무를 다시 심고, 그해 9월3일 亭子新建工事를 준공하였다. 이후 亭子확건과 부수공사에 한국 김서곤 허정남 김광휘 박일남 유호담 김교봉 조일형 임종문 이상옥 황규흠 조재만 박응준 선생등이 협찬하였다. 2001년 9월3일 龍井市人民政府 용정 비암산 에 있는 일송정(一松亭,이쑹팅) 정자에서 기념촬영 선구자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된 일행 그 아래로 해란강이 유유히 흐른다. 선구자 작사 윤해영 / 작곡 조두남 1.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국내성 성벽에서 압록강을 마주하고 있는 국내성은 서기 3년 졸본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 427년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 온 곳이다. 즉,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다.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국내성을 기반으로 해서였으며, 광개토왕이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하며 국력을 과시할 때의 수도도 국내성이었다. 따라서 첫 도읍지였던 졸본 즉, 환인보다는 국내성이 있는 이곳 집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고구려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국내성은 총길이 2,686m로 일제시기 까지만 하더라도 성벽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심하게 파괴되었다가,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대규모로 복원되어 지금은 제법 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만찬 중에 한컷 찰칵! 일본 도다이사(동대사)의 사슴공원에서 필자 이곳의 사슴들은 사람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과자 등을 얻어 먹는다. 동대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사슴공원이다. 일본 나라 사슴공원은 광장히 넓은 부지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 동대사가 위치해 있다. 여기가 어딘지..19년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일본 교토에 있는 기요미즈사(청수사) ‘교토 여행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라는 수식어가 붙은 기요미즈데라는 '순수하고 깨끗한 물'이라는 뜻으로 정갈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특이하게도 절벽에서 10여m 튀어나온 곳에 있다. 사원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막상 들어서면 탁 트인 전망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사찰 안에는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지슈 신사와 마시면 건강, 학업, 연애에 효험이 있다는 오토와 폭포가 있다. 特別史跡 '百濟寺跡' 백제사적 일본 속 백제인의 흔적 '백제사 유적' 백제사 사적공원에는 고대의 거대한 가람 터의 주춧돌들이 각기 제자리에 잘 보존돼 금당을 비롯한 동탑과 서탑, 중문과 남문, 금당 뒤의 강당과 식당 터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다. 4~5세기 한자를 일본에 전한 백제인 왕인박사의 묘가 이 지역에 있으며 8세기 일본 나라(奈良)시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손자 경복(敬福)왕이 창건한 백제사(百濟寺)의 절터이다. 경복왕이 이 지역에 건립한 오사카부(府) 히라가타(枚方市)에 위치한 백제사(百濟寺)의 유적은 국가에 의해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사 유적 옆에는 경복왕을 받드는 백제왕신사도 있다. 동대사를 배경으로 찰칵! 동대사(도다이사) 대불전앞에서 기념촬영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다이사(東大寺)대불전 규모가 15층 아파트와 같을 정도로 거대한 목조건물이다. 동대사란 일본어로 '도다이지', 즉 동쪽에 세워진 큰 절이란 뜻이다. 13일간 함께 어우러진 분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다시 뵈니 반가운 마음과 함께 가슴이 쩌릿해 온다. 한지붕 한솥밥 긴 여정으로 분단의 아픔까지 함께 나누었던 지난 날들이 다시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며 그때 그 감동과 뭉클함이 가슴에서 되살아난다. 이 모습에 19년 더하면 지금은 얼굴에 세월線이 19개씩이나 생겼을테지.. 두산그룹 임직원님들과 그리고 동행한 조선팔도 일행님들을 시마을에 모시니 그때 그 감동이 다시 찾아주어 에너지로 남는 것을...... 혹여 지나는 길에 보시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모두들 사는동안 무탈한 인생여정으로 건강하세요. 두산그룹 연강재단에서 맺어 준 잊지못할 그 때 그 사람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녀온 곳 일부분입니다. 19년전 이야기를 기억해 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사진 몇점은 인터넷에서 옮겨오기도 했습니다. 글은 인터넷검색으로 공부도 하며 활용했습니다. 사진편집및글 찬란한 빛/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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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빛e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전 페이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직에서 물러나기전 한창때 활발했던 시기를 다시금 들여다 보니 새롭습니다.
2년전에 작성한 게시물입니다.
새 페이지가 생기기 얼마전이어서 조회수가 그리 많지않아 많은 분들과 공유함이 좋을 것 같아
옮긴 게시물이지요.
21년전이므로 지금은 정비도 잘 되어 있어 많이 달라져 있지요.
그 때를 들여다 보심도 좋을 것 같아서요.

보람의향기님의 댓글

profile_image 보람의향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방에 매일 들어오는데요
늘 궁금한것이 있어요
그렇게 많이 즐기시는 여행이 때론 지겹다는 생각이 안드시나요
암튼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한번두 못가는 여행을 이렇게 많이들 다니세요
많이 부럽습니다 74년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두 여행을 가본일이 없습니다
국민학교때 수학 여행두 못갔습니다-돈이 없어서요
피난 나와 먹고 살기도 어려웠어요
찬란한 빛님 고마워요 -지원스님합장

찬란한빛e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찬란한빛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스님이셨군요. 지원스님..저야말로 합장 인사드립니다.
매일 찾아 주심에 큰 감사드리며 또한 큰 힘을 안게 됩니다.
여행은 20대부터 다니던 가락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여행기록은 십여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꼬불노인이 되었을때 옛날을 회상하며 방콕에서 즐겁게 지내려고 기록을 시작했는데,
하다보니까 이 많은 자료들을 혼자 두고 보기엔 아깝단 생각이 들어 나눔의 미학으로 오픈을 하게 되었어요.
보관용을 겸한 기록문이라 인물사진이 많이 나오는데 처음엔 그 점을 꺼려 많이 망설였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기에 자신을 더욱 가다듬을 수 있단 생각으로 모습까지 오픈이 된거지요.ㅎ
기록을 하게 되면서 여행을 현장을 찾아 학습겸 스포츠겸 건강관리차 저의 일상으로 즐기는
저의 문화로 자리잡혀 생활화 되어 있답니다. 자연히 즐기는 저의 문화 한 면이지요.
그로 인해 나이에 비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전엔 자동차로 오지를 돌며 다녔지만 지금은 대중교통으로도 충분히 적은 비용으로도
경로할인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어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더불어 건강도 얻구요,
노을빛 인생이지만 하던 가락을 여전히 즐기게 됩니다.
열심히 보아 주시고 진솔하신 답글에 감동을 받아 길게 드리웠습니다.
큰 감사드리며 건강하세요.

안박사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안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찬란한빛`김영희* 旅行作家님!!!
 "찬란한빛"任의 旅行記를 보면,참으로 感動이 절로..
  아름다운映像과 詳細한 旅行記를 보면,"김"先生任의..
  21年前 "김영희"先生任의 貌濕을 對하니~참말 곱네如..
 "Asia`大國- 中國"의 이곳`저곳을,두루 旅行하는듯 實感..
 "김영희"作家님! 40代`靑春처럼,곱게머무시고..늘,幸福`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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