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문학가 산책
  • 오늘의 시

 (관리자 전용)

 
☞ 여기에 등록된 시는 작가의 동의를 받아서 올리고 있습니다(또는 시마을내에 발표된 시)
☞ 모든 저작권은 해당 작가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작성일 : 18-04-02 10:57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427  

낯선 집 
       
      배창환 


                           
나 오래 전부터 꿈꾸었지 멀고도 가까운 훗날
내가 살고 있는 이 집 지나다 무작정 발길 이끌어 들르는 때를
그때 이 집에는,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 타고 놀던 밝은 햇살과
그늘이 흐릿하게 새겨진 오래 된 이 목조 건물에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중년 안주인이 마당과 부엌을 방앗간 참새처럼 들락거리면서
수돗가에 앉아 방금 텃밭에서 뽑아온 배추를 씻고 파를 다듬고
둥근 기와지붕도 잡풀 성성한 앞마당도 백구 강아지도 뒤란의 물길도
이 집 지켜 온 감나무 가지도 청설모가 들락거리던 속이 텅텅 빈 호두나무도
우물 메운 자리 뿌리 내린 매실나무도 어린 불두화도
어떤 것은 그대로이고 어떤 것은 몰라보게 자랐고 어떤 것은 사라져버린
생전 처음 보는, 아주 낯선 집처럼 서서 흐려가는 집


나는 모른 체 마당에 들어서서 옛날 영화에 나오는 선비처럼
이리 오너라, 호기로이 큰 소리로 주인을 부르려다 말고
계십니까? 계세요?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소리를 낮추어, 지나가는 사람인데요, 목이 말라서, 입을 열어
물 한 그릇 얻어 천천히 마시면서 눈은 재빨리 마루 안쪽
지붕을 지탱하는 아름드리 적송 대들보와 거기서 발 죽죽 벋은 서까래와
언젠가 손질하려다 결국 못하고 만, 회 떨어져 나가 둥글게 패인 자국과
남궁 산의 89년 작 ‘봄처녀’ 판화 걸었던 못 자리와 내 책장 섰던 자리
꽂혔던 잡지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받쳐 온 시집들을 떠올려보면서
이윽고 내가 물그릇을 다 비우고 빈 그릇을 돌려주면 주인 아주머닌
참 별 희한한 사람 다 있네, 남의 집 뭐 한다고 뚫어보고 난린고, 고개 갸우뚱하며
미닫이 유리문을 스르르 쾅, 닫아버릴 때 내 가슴도 함께
닫혀버리는 짧은 순간, 아찔해져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고     
발길을 돌려 돌아가는......그런 순간을
    
그러면 나는 안녕,
나의 집이여, 고마운 햇살이여 그늘이여, 바람에 쌓여 간 시간이여
안녕, 지난날들에 무수히 고맙다고 아프다고 절하고 돌아서면서
변함없이 돋아난 마당의 잡풀마다 머리 쓰다듬어 주고 변함없이
푸르른 하늘, 동산 상수리나무 머리 위로 내려온 파란 하늘에 손을 적시면서 
발걸음에 바위 추를 달고,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면서
그래, 인생이란 이런 거야, 그럼, 이런 것이고말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하며 돌아서는 집
그 날을 꿈꾸면서, 그날이 오기를, 그날이 오지 않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오늘도 그리운 그 옛집 낯선 집에 산다 


- 《내일을 여는 작가》 2006년 겨울호

  

 


배.jpg

1955년 경북 성주 출생

1981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잠든 그대』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백두산 놀러 가자』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겨울 가야산』 『소례리 길

시선집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오늘의 시 등록 관련 안내 관리자 07-19 41282
1368 정어리 정어리 떼 / 이정란 관리자 09-21 98
1367 모종의 날씨 / 김 언 관리자 09-21 103
1366 블루홀 / 이병철 관리자 09-20 182
1365 조치원을 지나며 / 송유미 관리자 09-20 178
1364 자주 찾아 뵈올께요 / 문도채 관리자 09-19 241
1363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 / 임동확 관리자 09-19 199
1362 스물하나 / 정한아 관리자 09-18 291
1361 문득 그런 모습이 있다 / 이성복 관리자 09-18 307
1360 꽃의 최전선 / 정하해 관리자 09-17 340
1359 손바닥 성지 / 길상호 관리자 09-17 274
1358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 배영옥 관리자 09-12 783
1357 그해 봄 서정춘 만세가 있었네 / 맹문재 관리자 09-12 465
1356 능소화 / 김주대 관리자 09-10 669
1355 분실된 기록 / 이제니 관리자 09-10 592
1354 바다 / 백 석 관리자 09-07 910
1353 상수리나무 아래 / 나희덕 관리자 09-07 698
1352 몇 겹의 사랑 / 정 영 관리자 09-06 778
1351 흐르는 거리 / 윤동주 관리자 09-06 765
1350 도라지꽃 비화 / 허영숙 관리자 09-05 699
1349 사슴공원에서 / 고영민 관리자 09-05 598
1348 말 / 장승리 관리자 09-04 729
1347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관리자 09-04 712
1346 가을의 소원 / 안도현 관리자 09-03 974
1345 옛 공터 / 이사라 관리자 09-03 671
1344 시소에 앉아 귓속의 이야기를 듣네 / 박정석 관리자 08-31 801
1343 그날의 하루를 만난 오늘 하루 / 김길녀 관리자 08-31 813
1342 섬진강 / 최정신 관리자 08-30 861
1341 여름 궁전 / 성영희 관리자 08-30 779
1340 바람을 읽는 밤 / 박주택 관리자 08-29 955
1339 금대암에서 압축파일을 풀다 / 정태화 관리자 08-29 688
1338 가을 산녘 / 구재기 관리자 08-28 991
1337 시인들을 위한 동화 / 한명희 관리자 08-28 795
1336 서봉氏의 가방 / 천서봉 관리자 08-27 776
1335 말년.10 / 하종오 관리자 08-27 824
1334 사과의 시간 / 최승철 관리자 08-24 1049
1333 8월의 축제 / 박해옥 관리자 08-24 940
1332 2인용 소파 / 채수옥 관리자 08-23 1017
1331 아껴둔 패 / 양현근 관리자 08-23 1089
1330 이슬 / 손진은 관리자 08-22 1096
1329 마음밭의 객토작업 / 최상호 관리자 08-22 888
1328 가지치기 / 김기택 관리자 08-21 1068
1327 푸르다 / 양문규 관리자 08-21 1033
1326 발해로 가는 저녁 / 정윤천 관리자 08-20 925
1325 천적 / 김학중 관리자 08-20 929
1324 딱새의 작은 고추 / 김상미 관리자 08-16 1197
1323 자정의 심리학자 / 최서진 관리자 08-16 1034
1322 뿌리의 생각 / 최금진 관리자 08-14 1227
1321 악몽은 밤에 더 번성하죠 / 장석주 관리자 08-14 1049
1320 코너 / 정영효 관리자 08-10 1127
1319 늪의 입구 / 연왕모 관리자 08-10 1095
 1  2  3  4  5  6  7  8  9  10    

 

select count(*) as cnt from g4_login where lo_ip = '54.162.239.233'

145 : Table './feelpoem/g4_login' is marked as crashed and should be repaired

error file : /board/bbs/board.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