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문학가 산책
  • 오늘의 시

 (관리자 전용)

 
☞ 여기에 등록된 시는 작가의 동의를 받아서 올리고 있습니다(또는 시마을내에 발표된 시)
☞ 모든 저작권은 해당 작가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작성일 : 17-04-07 11:40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83  

호텔 스톡홀름 3

 

곽은영

 

 

1

버리고 가는 이와 담아가는 이

스톡홀름을 떠날 때는 그렇다

낚시꾼들은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예쁜 마크의 냅킨과 타월

쿠키와 차를 넉넉하게 가져다 놓았다

낚시꾼들의 방은 약간의 생선 비린내가 남지만 말끔하게 치울 수 있다

버리고 가는 이들은

어딘지 수척해 보였다 그들이 현관을 나설 때는

트렁크의 부피가 그다지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빗 양말 쪽지 빵조각

심지어 사람도 버리고 간다

나는 그들을 위해 일부러 작은 쓰레기통을 둔다

버리고 싶은 것은 그냥 두고 떠나면 되도록

그들은 고통에서 깨끗하게 빠져나가고 싶기 때문에 무엇을 버린다

 

2

스톡홀름에 버려진 것 중 가장 크고

치우기 곤란한 것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버려진 사람은 여러 날의 숙박료를 미리 지불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져 땅 속으로 스며들길 원하는 토마토처럼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랬다

 

바짝 깎은 머리와 조금 퀭한 눈빛의 그는

하루 종일 TV를 보았다

식사를 가져다주며

스톡홀름은 사람을 버리는 곳이 아닙니다

말하고 싶었지만

더 필요한 게 있으세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괜찮다는 그에게

1층의 전화기를 쓰셔도 됩니다

친절하게 덧붙였다

 

3

가까운 곳에 바다와 울창한 숲이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스톡홀름은 사람을 버리기에도 적당한 곳에 있다

잔인함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버려진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와 전화를 걸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삐걱 삐걱

나는 새삼 계단의 낡은 소리를 기다렸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랬다

 

4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스톡홀름에 온다

불행히도 나는 호스트일 뿐

의사나 친구도 되어주지 못한다

 

5

나는 그가 스스로를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기적이게도

스톡홀름을 죽음의 출발지로 만들 수는 없었다

나는 3번의 식사시간 외에

차와 쿠키를 먹는 간식과 칩과 맥주를 먹는 오락을 생각해냈다

여행객들을 감시해서는 안 되지만

스톡홀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 놀란 빛이 확연했다

이런 서비스가 제공되는 줄 몰랐습니다

그가 짧으나마 여행객의 설레는 표정을 짓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6

그와 나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카드를 펼쳤다

나는 하트의 퀸을 좋아한다

그는 솜씨있는 카드꾼이었다

내가 하트 퀸을 노리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번번히 졌다

그는 노련한 스페이드 잭이었다

가장 큰 패는 누구나 원하죠

그래서 실패하기도 쉽습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문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마지막 패를 열었다

스페이드 에이스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그도 표정이 어두웠다

스페이드 에이스

아마도 그는 스스로 품은 칼에 찔렸을지도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아 주었다

 

한밤 중 하루의 쓰레기를 버리려고 뒤뜰에 나왔을 때

그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7

그가 지불한 만큼의 시간을 채우자 나는 불안해졌다

그의 계단소리를 듣기 위해 내 귀는 이미 뾰족해졌다

더 머무를 것인지 물어봐야 했다 스톡홀름의 규칙이니까

그러나 두려웠다

망설이던 아침 기다리던 발소리가 났다

그가 쥐고 있던 마지막 패가 떠올랐다

전화를 걸까 숙박료를 낼까

숙박료를 낸다에 하트 퀸을 걸겠어

그가 내 앞에 섰다

전화를 써도 될까요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수화기를 들어 건넸다

난 또 졌구나 피식

하루가 가기 전에 도어벨이 급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슬쩍 눈을 마주치고 멋쩍지만 어쩔 수 없었던

그림자를 놔두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방을 치웠으나 무엇이 그를 일으켜 세웠는지 찾지 못했다

그가 버리고 간 것은 없었다

창을 열어 바람이 들어오도록 오래오래 놔두었다

가장 큰 패는 누구나 원한다

그래서 실패하기도 쉽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패를 원한다

 

 



곽은영.jpg

1975년 광주 출생

1997년 전남대와 2001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검은 고양이 흰 개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오늘의 시 등록 관련 안내 관리자 07-19 24872
974 바람은 알까? / 안행덕 관리자 10:55 84
973 배롱나무 / 조두섭 관리자 09:51 55
972 껌 / 이승리 관리자 08-21 179
971 감응 / 양현주 관리자 08-21 159
970 가문동 편지 / 정군칠 관리자 08-14 647
969 별 / 조은길 (1) 관리자 08-14 586
968 나나가 사랑한 / 권기만 (1) 관리자 08-11 627
967 바람의 사거리 / 박은석 (1) 관리자 08-11 627
966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 위해서 / 이문숙 관리자 08-10 496
965 도깨비 멸종에 관한 보고서 / 이동재 관리자 08-10 465
964 독서의 시간 / 심보선 관리자 08-08 663
963 모래시계 / 신용목 관리자 08-08 619
962 사라진 것들은 어디쯤에서 고이나 / 오 늘 관리자 08-04 893
961 잔고 부족 / 이동우 관리자 08-04 861
960 그냥 그대로 흘렀으면 좋겠네 / 배창환 관리자 08-03 830
959 형상기억 / 백미아 관리자 08-03 710
958 계란과 스승 / 이재무 관리자 08-02 791
957 정오의 의식 / 김기형 관리자 08-02 727
956 그림자 반성 / 하종오 관리자 08-01 789
955 반듯한 슬픔 / 전 향 관리자 08-01 807
954 구름 / 손창기 관리자 07-31 832
953 그림자에 등을 기댄다 / 안효희 관리자 07-31 757
952 민들레하우스 / 엄원태 (1) 관리자 07-28 932
951 미조리 가는 길 / 오인태 관리자 07-28 822
950 여름 / 이시영 관리자 07-27 1065
949 조각달을 보면 홍두깨로 밀고 싶다 / 이인철 관리자 07-27 820
948 불혹의 구두 / 하재청 관리자 07-26 911
947 귀가 / 한길수 관리자 07-26 880
946 꽃은 꽃이어야 꽃이다 / 장종권 관리자 07-25 989
945 석류의 분만기 / 정석봉 관리자 07-25 860
944 '있다'와 '없다' 사이로 양떼를 몰고 / 윤석산 관리자 07-24 913
943 바람, 난 / 윤지영 관리자 07-24 964
942 귀갓길 / 윤병무 관리자 07-21 1063
941 나프탈렌 / 이 산 관리자 07-21 952
940 물총새 사랑법 / 배찬희 관리자 07-20 1051
939 사막을 건너는 법 / 김지훈 관리자 07-20 1030
938 근황 / 윤임수 관리자 07-19 1112
937 나의 사랑 단종 / 유현서 관리자 07-19 1027
936 검은등뻐꾸기의 울음 / 임 보 관리자 07-18 1054
935 초여름에서 늦봄까지 / 홍해리 관리자 07-18 1060
934 현관문은 블랙홀이다 / 남상진 관리자 07-17 1070
933 사랑한다 / 조하혜 관리자 07-17 1208
932 거울 속의 잠 / 정한아 관리자 07-14 1244
931 내 사랑 물먹는 하마 / 정태화 관리자 07-14 1142
930 여우속눈썹 / 수피아 관리자 07-13 1235
929 슬 / 나병춘 관리자 07-13 1180
928 고추잠자리 / 박수서 관리자 07-12 1238
927 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 김영남 관리자 07-12 1176
926 괜찮아 / 한 강 관리자 07-11 1455
925 찰칵 / 오세영 관리자 07-11 1250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