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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전용)
☞ 舊. 이달의 시인
 
☆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중견시인의 대표작품(自選詩)을 소개하는 공간입니다
 
 
  
 작성자 : 고영
작성일 : 2015-08-06     조회 : 3594  






달걀

고영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창을 닫았다.
어둠을 뒤집어쓴 채 생애라는 낯선 말을 되새김질하며 살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집은 조금씩 좁아졌다.

강해지기 위해 뭉쳐져야 했다.
물속에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있는 힘껏 외로움을 참아야 했다.
간혹 누군가 창을 두드릴 때마다 등이 가려웠지만.

房門을 연다고 다 訪問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위로가 되지 못하는 머리가 아팠다.

똑바로 누워 다리를 뻗었다.
사방이 열려 있었으나 나갈 마음은 없었다.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나는 아직 더 잠겨 있어야 했다.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

고영


아무 거리낌 없이
강물에 내려앉는 눈발을 맹목적이라고 허공에 쓴다

아픈 기억들을 불러내어 물 위에 놓아주는 강가
무늬도 없는 저녁이 가슴을 친다
하류로 떠밀려간 새들의 귀환을 기다리기엔
저 맹목적인 눈발들이 너무 가엷고
내겐 불러야 할 간절한 이름들이
너무 많다

강물에 내려앉은 눈이 다 녹기 전에
아픈 시선 위에 아픈 시선이 쌓이기 전에
바람이 다 불기 전에
상처가 상처를 낳기 전에

너라는 말
자기라는 말
누구누구의 엄마라는 말
당신이라는 말
미안하다는 말

모두 돌려보내자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자

속수무책 쏟아지는 저 눈이 녹아
누군가의 눈물이 되기 전에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자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을 배우기 전에




뱀의 입속을 걸었다

고영


뱀이 쓸쓸히 기어간 산길
저녁을 혼자 걸었다

네가 구부러뜨리고 떠난 길
뱀 한 마리가
네 뒤를 따라간 길
뱀이 흘린 길

처음과 끝이 같은 길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길

너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너의 입속을 걸었다

뱀의 입속을 걸었다




저녁이 다 오기 전에

고영


아무도 찾지 않는 강가를 걸었다
바람을 업고 포도나무 반대편으로 몇 걸음 떼었더니
당신이 젖은 손을 흔들던 쪽에서
꽁지깃이 유난히 붉은,
푸른 머리를 가진 새가 날아올랐다

새들은 모두 푸른 영혼을 가졌을 거라고
그래서 하늘이 푸른 거라고
일렁이는 손으로 강물 위에 새를 그렸더니
금세 물결이 데려갔다

내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포도나무에 필 꽃들을 기다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소식을
영영 기다릴 수밖에 없는 폐허의 심정으로
천천히 저녁을 걸었다

포도넝쿨은
왜 한사코 서쪽으로만 뻗어 가는지
포도밭에서 건너온 노을이
흐르는 강물을 다 건너가기 전에

포도나무도 모르는
포도나무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고영


미인이 다녀갔다
미인이 앉았던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눈동자가 붉은, 그래서 슬픈 꽁지를 끌고
뒷모습의 표정만을 남긴 채
공중의 한 부분을 베어내듯 그렇게 그렇게
미인이 다녀갔다

미인이 흘리고 간 뒷모습의 환영은
오래 황홀했지만,
환영이란 결국
뒤집어볼 수 없는 달의 이면, 그 너머에 누군가 꽂아놓은
허망한 깃발 같은 것
그런데 미인들은 왜 다들 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나
그곳엔 어느 은자(隱者)가
살고 있나

은자(隱者)여, 미인을 데려가지 마오

씻을 수 없는 여운에 기대
살아 있는 날개를 꺾어 깃발을 만들지 마오
저 차디찬 공중에 펄럭이는
뒷모습의 환영이, 공중의 한 부분을 베어내듯
오래, 아주 오래
각인이 되어 흐를 때까지

은자(隱者)여, 미인을 데려가지 마오




황야의 건달

고영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

용케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 대견스럽다는 듯
쇠줄에 묶인 진돗개조차 꼬리를 흔들며 알은 체를 한다.
짜식, 아직 살아 있었냐?

장모는 반야심경과 놀고 장인은 티브이랑 놀고
아내는 성경 속의 사내랑 놀고
아들놈은 리니지와 놀고
딸내미는
딸내미는,

처음 몸에 핀 꽃잎이 부끄러운지 코빼기 한 번 삐죽 보이곤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나마 아빠를 사내로 봐주는 건 너뿐이로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황송하구나. 예쁜 나의 아가야.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식탁에 앉아 소주잔이나 기울이다가
혼자 적막하다가
문득,

수족관 앞으로 다가가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블루그라스야, 안녕! 엔젤피시야, 안녕!
너희들도 한잔할래?
소주를 붓는다.




삼겹살에 대한 명상

고영


여러 겹의 상징을 가진 적 있었지요
언감생심, 일곱 빛깔 무지개를 꿈꾼 적 있었지요
불판 위에서 한 떨기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 있었지요

흰 머리띠를 상징으로 삼았지요
피둥피둥 살 바에는 차라리
불판 위에 올라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요
육질이 선명할수록 사상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요
달아오른 불판이 멀리 쏘아 올리는 기름은
발가벗은 내 탄식이었지요

몸 뒤틀리고 몇 번쯤 뒤집혀지고 나면
(제발, 세 번 이상은 뒤집지 마세요)
내 사명도 끝난 줄 알았지요
노릿하게 그을린 얼굴들이 참기름을 두르고 앉아
마늘처럼 맵게 미소를 주고받을 때
소원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저 말라비틀어진 살점들을 어찌할까요

어쩌다 간혹 안부나 물어봐주세요
그러면 나는 그냥
무지개를 꿈꾸다 죽은 한 마리 돼지의 어쩔 수 없는 옆구리였다고,
불판 위의 폭죽이었다고,
웃기는 돼지였다고 웃으며 말할 날 있겠지요




킥킥, 유채꽃

고영


열여덟 이른 나이에 사내를 알아버린 누이는 툭하면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

바람난 딸년을 집구석에 들여앉히기 위해 아버지는 누이의 머리끄덩이에 석유를 붓고 불을 싸질렀다.

머리에 꽃불을 이고, 미친년처럼 온 들판을 뛰어다니던 누이를 누렁개들이 좋아라 쫓아다녔다.

그 몰골에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나는 그만 킥킥,

봄날이 가기 전에 누이는 결국 시집을 갔지만 배부른 신부를 보고 나는 또 그만 킥킥,

누이가 떠난 후 들판에 핀 유채꽃에서 진한 석유냄새가 났다.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

고영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 들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판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가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들을 보호해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고영


산복도로에 한 척의 방이 정박해 있다.
저 방에 올라타기 위해선 먼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백마흔여섯 계단 위에 떠 있는 섬 같은 방
바람이 불 때마다 티브이 안테나처럼 흔들렸다가
세상이 잠잠해지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방은
1m 높이의 파도에도 갑판이 부서질 만큼 작고 연약한 쪽배다.
저 쪽배엔 오래된 코끼리표 전기밥통이 있고
성냥개비로 건조한 모형함선이 있고
좋은 추억만 방영하는 14인치 텔레비젼이 있다.
갑판장 김씨를 집어삼킨 것은 20m의 파고라고 했던가,
사모아제도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 그는 어쩌면
산복도로에 뜬 저 쪽배의 항해를 걱정했을지 모른다.
가랑잎 같은 아이를 가랑가랑 쪽배에 싣고
신출내기 선장이 된 그녀,
멀미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 쌓일수록 계단 숫자도 늘어
어느덧 산꼭대기까지 밀려온 쪽배 한 척
그녀에게선 사모아제도의 깊은 바다냄새가 난다.
높은 곳으로 올라야 아빠별을 볼 수 있다고
밤마다 전갈자리별에 닻을 내리는 쪽배의 지붕으로
백년 만에 유성비가 쏟아져 내린다.



고영
1966년 안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2003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딸꾹질의 사이학』과 감성 시 에세이집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등이 있다. 현재 계간 《시인동네》 주간 및 발행인을 맡고 있다.

조경희 (15-08-06 10:15)
고영 선생님 반갑습니다
언젠가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 을 읽고
그 여운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는데요,
시마을에서 또 다른 좋은 시를 읽고 공유할 수
있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라며
시마을가족들과 뜻 깊은 8월이 되셨으면 합니다
농부의다락 (15-08-06 10:49)
반갑습니다. 고영시인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향기초 (15-08-06 13:28)
킥킥, 유채꽃 

첨 이 시를 마주했을 때

저두
그만
킥킥했습니다

영상시 방에

부족하나마
올려 보았습니다^^

시인님 참 반갑습니다~~~
김태운. (15-08-07 17:47)
참 좋은 시향을 기분 좋게 맡고 갑니다
시마을에서 뵙게 되어 감사합니다
향기초 (15-08-07 17:50)
식사는 하셨는지요

천둥 번개
소나기가 훅~
지나가네요^^

코스모스..영상시방에
부족하나마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문재 (15-08-10 19:33)
이상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읽다가 알지도 못하는 시인이 그리울때가 있어요
그림자 한번도 밟아본적 없는데 마치 그가 머무는 슬픔의 계곡에 남의 눈을 피해 들락거린지 오래 되는 여인네 처럼
마냥 그리워 막 전화기를 돌리고 싶을때가 있어요
이런 그리움을 무엇이라해야 하나요? 피의 끌림?ㅎㅎ
모르겠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시를 좋아하고 끄적거리는 사람이 시인을 좋아하면 근친상간 소지가 있는 거라고.ㅎ
그래도 시인은, 내가 읽고 싶었던 시를 쓴 시인은 다 그리움이예요.ㅎㅎ
미소.. (15-08-11 10:03)
선과 각의 길은 오를수록 더 올라야 할 높은 곳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허기 정말 견디기 힘든 것 같습니다. 고영 시인님, ^^*

올려주신 소중한 시 오늘은 "달걀" 한 편만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폭염 속이지만 건강하시고 기쁨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미소.. (15-08-12 17:59)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을 배우기 전에 /

아침에 쓴 코멘트 수정하려다가 날려버렸습니다, ㅜㅜ
다시 한 번 감상하고 갑니다.
미소.. (15-08-13 10:02)
뱀의 상징성을 생각하며 읽습니다.
대상의 상처를 감춰주기 위해 뱀의 입속을 걷는 화자
대상이 하는 말을 모두 믿는 척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올려주신 시 편 중에 오늘까지 세 편을 읽었는데요
사랑이 참 깊으신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소.. (15-08-25 10:07)
꽁지깃이 유난히 붉은... 참 육감적입니다
포도나무의 배후는 농부?
당신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이별 이후의 '시'인 것 같습니다, 시인님!
여운 깊은 이별은 아픈 만큼 아름답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저녁이 다 오기 전에/ 오늘도 한 편 소중히 감상하고 갑니다, ^^*
미소.. (15-08-26 10:21)
날개가 있는 /새/ 는 결코 한 자리에서 펄럭이지 않는 다는 말씀인 것같습니다
미인은 새와 같아 내 것 일 수 없고...
미인에겐 돌아가야 할 은자가 있을 것 같고 그 은자는 신비스럽기까지 하고...
그 은자는 거물일까요? 미남일까요?
다가갈 수 없는 세계를 본 것 같습니다, 시인님, ^^*
향기초 (15-08-29 11:16)
시인님
안뇽하시져..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 / 고영

부족하지만 영상시방에 올렸습니다

무지 마니 고민하다가...
이유는 골목길이미지를 몇 분의 작가님 사진을
골라 놓고 보니 역시 골목길 답게 ...
그래서 그냥 가을 이미지로 전환했지만
내용만큼은 마음에 꼬오옥 새겨 넣었답니다

좋은시 감사 드리구여

밥 꼭 챙겨 드시고 건강하세욥~~~~
오영록 (15-09-11 09:50)
반갑습니다. 고영시인님.//
이곳에서 뵈니 더 반갑네요..~~
최정신 (15-12-02 22:28)
시로 만났던 고영시인님
시마을 등불 밝혀 주심 감사합니다
광명인 (16-03-14 19:10)
살째기 다녀갑니다
풍차주인 (16-03-31 12:28)
재밌는 시와 글입니다
영상시와 카페에..
함께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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