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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작성일 : 18-04-09 13:27
 글쓴이 : 金離律
조회 : 273  
◉시, 기도, 약속



무한 질주 / 이진환
모르듯이 / 조성범
무서운 젊은이 / 유옥희


이번 달 글제는 시, 기도, 약속이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시를 읽고 감상하는 것, 시에 대해 느낌을 말하는 지면에서 생뚱맞은 소제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지점에서 되돌아봐야 할 작금의 사회현상과 문단의 역할, 시라는 장르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며 궁극의 지향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과 활자화한 글에서 우린 과연 무엇을 기대하며 얻을 것인지? 글의 본질은 어쩌면 본향이라는 말과 같은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본향(本鄕)은 본디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태어난 곳, 생각의 시작점, 삶의 출발점, 돌아가야 할 곳, 모든 것의 원점이라고 광역해석해도 될 듯하다. 시를 포함한 모든 글의 본향은 어쩌면 마음의 안식이며 위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회고발, 세태풍자. 자기반성, 성찰, 등등의 과정도 있겠지만 그 모든 과정의 결과, 결말은 스스로에 대한 안식과 위안 아닐까 싶다. 글의 최종 도착점은 본향으로의 회귀하는 생각이 짙은 요즘이다. 



소제목의 시, 기도, 약속은 미국의 유명한 세계적인 컨트리 가수 John Denver라는 가수의 노래 제목이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어쩌면 이 세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굳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누구나 삶의 어느 변곡점에 서게 되면 할 수 있는 것이며 사회라는 풍랑 속으로 떠난 자식에 대한 어머님의 정화수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약속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의지라고 볼 수 있겠다. 어떻게 살며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에 대한 자신과 자신과의 약속,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주변과 자신과의 약속 모두가 해당할 것이다. 시는 그 모든 기도와 약속을 포용하는 것이 시라는 것의 속성이며 ‘본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의식표출일 것이다. 시는 한순간의 단상이나 풍경을 묘사하는 일회적인 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시시비비의 지난날을 반성하고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좀 더 진화하면 [나] 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지금 이 순간의 기억과 생각을 전승하는 그런 궁극의 지향점을 내포한 삶의 진지한 고백서라고 명명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행위예술과 표현예술의 모든 분야를 포용하는 수단이며 방법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실성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시를 쓰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교본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시를 쓰는 이유와 시라는 시문학 장르가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필자의 과문한 것에 연유하기도 하겠지만 많이 읽은 기억은 없다. 마치 아이들에게 세상을 사는 방법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이유를 자주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시 = 철학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뀐 지금, 대학에서 철학이나 인문학이 소외당하고 폐강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서양의 르네상스 시절에 융성한 것은 철학이며 유수의 철학자 역시 많이 배출한 지점이 그 지점이다. 문화적 융성은 삶의 본질에 대한 투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작금의 현대사회는 철학 이전에 먹고 살기 급급한 시대가 되었고 생존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핵심 화두 앞에서 문학과 철학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본성은 인간과 더불어 사는 것이며 그곳에 배려와 희생과 헌신이라는 화두가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생존과 경쟁 사이에 배려와 희생과 헌신을 적절히 융합 하는 것, 그 매개체로 시라는 장르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면 어쩌면 세상은 좀 더 다양한 정신적 진화와 생산적 진화의 어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최문자 시인은 어느 기고문에서 “시는 가장 위험한 칼”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시는 가장 단단한 방패일지도 모른다. 생존과 경쟁의 험한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지키고 주변과 가족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패는 실존적이며 진정성 있는 자기 고백과 성찰의 철학이 담긴 시라는 생각이다. 잠시 최문자 시인의 기고문을 인용해 본다. [칼]이라는 자리에 [방패]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읽고 생각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공격과 방어는 같은 이야기이면서 전혀 다른 개념의 이야기다. 우선순위가 칼이 될 때와 방패가 될 때의 차이는 매우 크다. 세상을 바로 잡자는 큰 목소리의 이면에는 어쩌면 바로잡기 위한 자신의 방패를 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는 가장 위험한 칼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문창과 교수)


벌써 오래 전 얘기다.

시 쓰는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울고불고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 남자는 날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고통으로 남아서 견딜 수 없어, 어떤 칼로도 이걸 잘라낼 수 없다구.”

그때는 대중가요 가사쯤으로 들리던 그 이야기가 나이 들어 다시 생각해보니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해봤자 상처만 깊이 내는 이별의 불행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잘라내지도 못하던 그녀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누구나 가슴에 말 안 듣는 칼 하나씩을 품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의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칼. 때로는 그 칼이 위기를 몰고 오기도 한다. 그 위험한 칼을 어떤 사람은 무심하게, 어떤 사람은 두려워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

잘 썰리지 않는 칼은 말썽만 부린다. 썰어야 할 물체의 부위 부위 상처만 내고 도마 위에 피만 낭자하게 고이게 만든다. 가끔 젊은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이 부러워진다. 그들에게서 잘 썰 수 있는 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차가 있다고 하겠지만 비교적 그들은 싫증나면 버리고, 더러우면 바로 침 뱉고, 아니다 싶으면 끊고 중지한다. 자기의식대로 잘 썰어지는, 잘 드는 칼을 자율적으로 사용한다. 

나는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안 드는 칼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 칼은 아무 힘이 없으며 그 누구의 사용 허락이 가능할 때만이 내 칼은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외로움도, 소외도, 분노도, 싸움도, 심판도 이 모든 고통의 사실을 내 마음대로 썰거나 잘라 내거나 수술하는 것에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남이 사흘 앓고 일어날 고통도 나는 한 달이 넘도록 끙끙대며 앓아야 했다. 단숨에 잘라내는 성능 좋은 칼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라 로쉐루꼬>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따라 살만큼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잠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나를 설득해내지는 못하는 말이다. 

그 동안 고통의 환부를 바로 수술하지 못해서 받는 고통은 엄청나게 많았다. 때로는 잘 들지 않는 칼로 섣부르게 자르려다, 오히려 환부만 건드려 더 큰 환부를 만드는 일도 자주 겪었다. 그 때마다 뼈를 깎는 수치감, 자괴감을 추스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데 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내가 잘 안 드는 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건드리고 또 건드리고 더 건드릴 수 없을 때까지 건드린다. 폭발 직전까지 일단 건드려 본다.

‘변변치 못한 칼로 뭘 어떻게 하려고?’
‘감히 나 같이 질기고 두꺼운 것을 그 칼로?’
하고 얕잡아 본다.


그 잘 안 드는 칼을 도구로 삼고 그러면서 여기까지 살아왔다. 모든 인간관계, 문단생활, 학문세계, 교회생활, 결혼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 도구를 버릴 생각을 못한다. 그 도구 자체가 내가 갖고 싶어 가진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깊이 사고하고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내 손에 들려준 도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지 못하고 그걸 사용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신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아예, 제 손에 아무 도구도 들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런 어설픈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 편,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나에게 아마 잘 드는 칼을 도구로 쥐어주었다면 수많은 것들이 잘려나가고, 또……또…… 생각만 해도 두렵고 소름 끼치기도 한다.


그 동안 크리스천이라는 사실, 대학교수라는 사실, 시인이라는 사실들이 내 삶에서 더욱 더 칼날을 무능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어느 평자가 내 시를 다루면서 월평에 쓴 글이 떠오른다. 

‘날카롭고 잘 드는 칼이 스치고 사라진 곳에 그의 시는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는 날카로움이 숨어있고 그래서 그의 시는 흐느적거릴 수 없다. 그는 푸른 날을 수면 위로 나타내 독자에게 보여주지 않지만 그의 시세계 속에는 날선 감각이 번득인다.’
라고 했다. 부분적으로는 잘 짚은 얘기라고 보았다. ‘자기 이성이 사라진 곳에서 바로 신앙이 시작된다. 라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박노해 시인의 시 「부드러운 페니스로」라는 시에서 ‘착한 사람도 화날 때 보면/성난 무처럼 뿔 속으로 들어간다. 라는 행이 새롭게 기억된다. 가장 부드러운 부분은 언제라도 뿔이 될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쇠처럼 강해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중의 치열한 전쟁과 고통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무딘 칼 때문에 슬픔과 절망을 통해 정화를 거치는 힘이 생성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칼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홍보 전략을 갖는 21세기의 시점에서 나는 늘 위기를 느낀다. 요즘도 어이없게 시달리고 있다. 피만 흥건하게 괸 기분이다.

이 맘에 안 드는 보잘 것 없는 도구 때문에……. 잘 안 드는 칼은 가장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늘 위험하지만, 주눅들지는 않는다. 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새파란 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시는 가장 위험한 칼/ 최문자 (시인, 협성대 문창과 교수』전문 인용


이번 호에서는 시, 기도, 약속이라는 명제에 부합되는 시 세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모든 시가 세 단어의 범주에서 크게 어긋나거나 벗어나지 않지만. 일반론 적인 범위에서 이해하기 좋은 시 세 편을 선정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가장 먼저 소개할 작품은 이진환 시인의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다. 살면서 앞을 보며 살면서 무한 질주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질주가 끝나갈 지점, 그 지점을 삶의 변곡점이라고 생각해보면 질주의  중간 또는 질주의 마지막 즈음에 도달하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유년의 내가 나에게 했던 약속, 기대와 갈망의 기도, 그 모든 것들이 질주로 인한 맞바람 앞에서 변화되거나 변질되거나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무한 질주



이진환



어디든 숨기를 잘하는 짙은 색이 나를 즐겨 찾았다

혼자라던가 우울해서가 아니라

기름 가득 채우며 흥얼거리던 나의 노래를 탕진해서다



빠져나가는 앞차의 엠블럼을 더듬는다

가문끼리 엉킨 팔짱을 하고

학벌로 살짝, 지성의 떼를 입힌

그 표정의 후렴, 슬쩍슬쩍

비트는 몸짓으로

가끔 우월적 소갈머리들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정오를 넘어서면서 그늘에 자연스레 섞여드는 저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품위란 그런 것이다



태생이다

가시가 있어 장미는 더 아름다워져야 하고

새를 거두는 나무는 날고 싶어서다



주유기에 시선을 맞추며 핸들에 박자를 넣는 손끝에

길은 먼데

계기판에서 떠는 바늘로

어디, 

투덜거리는 심사가 시동에 걸린다



삶이라는 무한 질주 앞에서 질주를 가로막는 것은 부단히 많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우선은 맞바람이며 내 옆을 달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의 질주, 나를 추월하는 다른 질주, 내가 추월해야 하는 질주, 질주에 지쳐 쉬고 깊은 마음,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은 자기방어 기제, 여하한 이유에서건 질주는 질주의 시작부터 질주가 아닌 본능이 될 것이다. 자전거는 페달에서 발을 놓는 순간부터 멈추기 시작한다. 생의 질주는 바닥에서 발을 멈출 때부터 멈추기 시작할 것이다. 본능에서 관성으로의 전이 내지는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의 질주에는 관성의 법칙이 반드시 존재한다. 멈출 수 없는 관성은 때론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고, 나를 태운 질주 수단보다 더 좋은 수단 앞에서 좌절하기도 한다. 좌절은 합리화라는 변명으로 미화되기도 하고, 좀 더 진화하면 세상을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질주의 끝에는 본향이 존재한다. 귀환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본향. 결국 앞으로 가기 위해 질주했지만 돌고 돌아 다시 온 곳은 질주의 시작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오를 넘어서면서 그늘에 자연스레 섞여드는 저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품위란 그런 것이다


질주에 충실하다면 주변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앞만 보고 간다는 것은 시야가 한정된다는 말이며 질주에 전념하기 위해. 생존과 관련된 부분만 보이는 법이다. 하지만 그 질주가 끝나갈 즈음 잊고 살았던 품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섞여드는 노을과 선선하게 볼을 만지는 저녁 바람. 자연스레 노을에 섞여드는 [나] 질주만 하면 품위는 없다. 생존만 있다. 하지만 삶은 품위가 있어야 살맛이 난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질주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시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빠져나가는 앞차의 엠블럼을 더듬는다

가문끼리 엉킨 팔짱을 하고

학벌로 살짝, 지성의 떼를 입힌

그 표정의 후렴, 슬쩍슬쩍

비트는 몸짓으로

가끔 우월적 소갈머리들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때론, 시를 글로만 보는 우를 범하게 된다. 문학적 표현과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 문장과 문맥, 압축과 감추기, 시어의 재발견, 공감각에 대한 표현이 누가 더 멋진지 등을 따지게 될 때 -따져야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필자는 그것을 질주라고 생각한다. 품위는 글의 본질을 보는 것이다. 시인이 말한 세상의 부조화와 부적격의 양태를 같이 보고 생각하자는 말이다. 문장만 따지고 들기에는 시가 너무 각박하다는 생각이다. 



주유기에 시선을 맞추며 핸들에 박자를 넣는 손끝에

길은 먼데

계기판에서 떠는 바늘로

어디, 

투덜거리는 심사가 시동에 걸린다



질주의 끝은 멀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생존이니까. 살아내기라는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야 하니까. 오토바이는 기름을 넣어야 움직이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하는 것이 한 집안의 가장이다. 가장이 무너지면 그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부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계기판에서 떠는 바늘처럼 떨면서도 시동을 걸어야 하는 것이 나와 내 가족이 우리에게 한 약속이니까. 시의 전반에 흐르는 생에 대해 아릿함이 숙연하게 만든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작품은 조성범 시인의 [모르듯이]라는 작품이다. 세상은 어쩌면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며 나는 그 돌아가는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서 때론 생살여탈권을 나도 모르게 쥐고 있기도 하고 어떤 누군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생살여탈권을 쥐기도 한 채 모르듯이 살아간다는 생의 속성을 잘 은유한 작품이다.



모르듯이



조성범



막 날개를 단 곤충들이 부양을 합니다

날아본 경험이 없는 벌레를 놓칠세라

오르락내리락 새도 바쁩니다

아수라장이 된 숲을 날다 길에 떨어진 풍뎅이,

손이 가도 날지 않습니다

혹시나 싶어 마시던 커피 한 방울 먹여봅니다

입을 달싹거립니다, 신기하다 싶은데

갑자기 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커피에 의지한 내 기운 같아서요

가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운 좋은 사람들의 전쟁 이야기를 듣습니다

무언가가 돌봤다고 각자 생각대로 말합니다

풍뎅이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애벌레 적 생사의 줄타기를 모르듯이,

어떤 관용의 힘으로

우리가 새날을 맞는지 모르듯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간밤

사실 같은 꿈을 남은 커피로 잊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간밤에 내가 모르는 사이, 가령 교차로를 무단횡단 할 때 좌측이나 우측, 전면이나 후면 어디선가 방금 스치듯 지나간 그 차가 0.1초라도 먼저 지나갔다면 나는 지금 살아있을까? 도로를 운전하고 가다 보면 중앙선 너머 달려오는 앞차가 깜박 졸아 나를 침범했다면? 하루에도 무수하게 많은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주거나 하면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다만, 우리가 그런 상황을 몰랐다는 것, 그 짧은 망각의 순간을 그만큼 짧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생은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수라장이 된 숲을 날다 길에 떨어진 풍뎅이,

손이 가도 날지 않습니다

혹시나 싶어 마시던 커피 한 방울 먹여봅니다

입을 달싹거립니다, 신기하다 싶은데

갑자기 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커피에 의지한 내 기운 같아서요



커피에 의지한 내 기운이라는 시인의 말이 참 아프다. 



무언가가 돌봤다고 각자 생각대로 말합니다

풍뎅이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애벌레 적 생사의 줄타기를 모르듯이,

어떤 관용의 힘으로

우리가 새날을 맞는지 모르듯이,



어떤 관용의 힘은 운명이다. 아니 운명으로 포장된 순간의 망각과 본능에서 비롯된 대다수 삶의 방식이다. 어떤 관용의 힘을 발견한 시인의 눈이 매우 날카롭고 철학적이다. 세상을 보는 관용의 눈을 보았다는 것과 스스로가 관용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따듯함이 잘 어우러진 시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관용의 힘은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기도 하고, 외부에서 오기도 한다. 다만,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관용을 보는 시인의 눈초리 앞에 필자의 문장은 다만 오만이며 편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간밤

사실 같은 꿈을 남은 커피로 잊습니다



사실, 문제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간밤에 넘겼는지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안다면 더 죽을 듯한 고통 속에서 살겠지만, 모르는 것이 더 낫겠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어떤 관용의 간밤을 지나 아침을 맞을 때 어떤 관용에 대해 매일 감사하고 살자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성경 말씀에 나오는 것을 기억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오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제 못 핀 목련 망울이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며,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포근한 날씨가 될 것이라는 예보 때문이며, 무엇보다 어제 죽을 고비를 수 십 번 넘겨 햇살 가득한 아침을 다시 맞았다는 것이다. 매 순간 기뻐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매 순간 감사하며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감사한 세상이다.



‘어떤 관용의 힘’



매우 철학적이며 이 시대에 썩 잘 어울리는 말이며 삶이라는 기도의 매일 기도 제목이라는 생각이다. 시가 충분히 세상을 방어하는 방패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째 작품은 어쩌면 요즘 현대사회에 가장 현실성 있으며 현실이 싸늘하게 느껴지는 [무서운 젊은이]라는 작품이다. 복지가 체계화되면서 노인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하지만 노령인구가 증가할수록 세대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유교적 관점에서 살아 온 세대의 존중과 산업화한 사회를 살아온 계층의 불만으로 인해 중년 이후의 세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어정쩡한 세대가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경각을 다시금 일깨우게 하는 작품이다. 



무서운 젊은이



유옥희



환승역, 군중 속

스마트폰에 꽂힌 젊은이

알아채고, 피한다 했는데도

부딪혔다

어이쿠! 미안도 놀람도 섞인 외마디



어깨에 메었던

가방 툭 떨어져, 쳐다보니

젊은이의 얼굴엔 미안한 표정과 말은 커녕

눈 부라리며 오히려 중얼대는 입 모양 보고

순간, 무섭고 어처구니 없었다



묘책 없는 노령인구 폭등에

청년들의 노인 부양 부담 된다는

심상치 않은 걱정스런 뉴스

문득, 내가 노인세대 되고 보니



만물박사인 디지털 시대의 재앙 속에서

노인들의 사회적 존재가치는 사라지고

생면부지의 젊은이들한테

공공연히 불편한 존재로

홀대 받는다는 느낌은 나만의 느낌일까



요즘은 젊은이가 무섭다



우스갯소리처럼 회자하는 말 중의 하나가 있다. ‘너 늙어봤냐? 나 젊어 봤다.“ 이 짧은 말에 현대사회의 갈등과 모순이 모두 담겨있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말하기 편하게 역지사지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본다는 것은 앞만 보고 질주하는 현대사회의 생존 모럴의 시스템 속에서는 가끔 헛말로 치부되기도 한다. 입장을 바꿔본다는 것과 입장이 바뀐다는 것은 분명 다른 말이다. 전자는 다만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내포하지만 ,후자는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것과 그런 것의 차이는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처럼 갭만 큰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말이기도 하기에 쉽지 않은 말이다. 다만 그 간격을 좁히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입장을 바꾸면 관용이 생긴다. 내가 아닌 너라는 것에는 포용이 발생할 여지가 충분할 것이다. 사회가 반목을 거듭하고 심화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내가 아닌 너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나와 너는 분명히 다르다는 관점에서 혼란과 상처, 무시와 무절제가 생기는 것 같다. 모두 할 말은 있다. 그리고 모두의 할 말은 매우 정당하다. 하지만 모두가 할 말만 한다면 과연 누가 모두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때로는 상대의 말과 현실을 좀 더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관용이 절실한 때가 지금 아닌가 싶다. 



문득, 내가 노인세대 되고 보니



만물박사인 디지털 시대의 재앙 속에서

노인들의 사회적 존재가치는 사라지고

생면부지의 젊은이들한테

공공연히 불편한 존재로

홀대 받는다는 느낌은 나만의 느낌일까



네가 내 입장이 되면 그때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거나 하게 된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입장이 되면 - 문득, 내가 노인세대가 되고 보니- 이 말 속에 내재된 입장이라는 것이, 아니 그 입장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한 걸음 뒤에서, 한 발자국 양보한 등 뒤에서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다. 모두 다 맞는 말이다. 젊은이가 쥐꼬리 같은 봉급으로 세금을 내고 그 세금이 생면부지의 노인 부양에 쓰인다면, 생면부지의 젊은이와 생면부지의 노인, 그 대결이 극한 구도로만 간다면 세상은 너무 암울할 것 같다. 



요즘은 젊은이가 무섭다



아마, 젊은 세대의 시인이 같은 맥락의 시를 쓴다면 요즘은 늙은이가 무섭다고 할 것이다. 과연 우리가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무서워하거나 무서움을 주며 살아야 하는지? 젊은이가 늙은이를, 늙은이가 젊은이를 서로 무서워하며 산다는 것은 그 근원의 문제가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누구도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주 잠시라도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관용이 필요할 것이다. 노인세대는 노인세대에 맞는 행동과 경험과 지혜를,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맞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기상으로 각자의 생에 충실하게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유옥희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부터 먼저 이해하고 반성하고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무서움의 대상이 아닌, 공경과 신뢰의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닌 사회다. 그만큼의 각자 노력과 희생이 수반되어야 한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적절한 판단과 계층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는 서로의 희생이 있을 때 사회는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서두에 소제목으로 언급한 John Denver라는 가수의 노랫말 중 끝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필자의 조악한 의역 실력으로 본문에 결례를 범한다는 것이 저어되지만 독자 여러분의 너른 관용을 구한다.



And talk of poems and players and promises 

And things that we believe in

How sweet it is to love someone

How right it is to care 

How long it's been since yesterday

What about tomorrow and what about our dreams and all the memories we share



시와 기도와 약속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가 믿어왔던 것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고

보살피는 것은 얼마나 따듯한 배려인지에 대해,

어제부터 얼마나 시간이 길었는지? 내일은 어떨지? 그리고 우리들의 꿈은

어떨지? 우리가 함께 나누는 모든 지금의 이 순간의 기억들.



『Poems, Prayers, Promise/- sung by John denver』노랫말 끝 부분 인용



글- 金離律(詩人, 評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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