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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작성일 : 18-04-17 14:03
 글쓴이 : 金離律
조회 : 68  
◉축약, 리얼리즘



도시는 매일 밀착된다/ 전성희
꿈보다 해몽/홍준표
로댕과 반가사유상/ 권상진



글- 金離律(詩人, 評論家)


  리얼리즘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다. 이상과 공상 또는 주관을 일체 배제하고 보이는 현상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재현하려고 하는 예술상의 경향이나 태도를 말한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사실주의나 현실주의 등의 단어와는 분명히 대별되는 말이기도 하다. 문학의 관점에서는 Representation을 제공하는 픽션의 방법, 서술의 형식의 한 형태라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예술 장르이며 기존의 과대한 공상이나 비현실성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문학사조이며 예술을 사회적 인식의 개념으로 정립하게 된 시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문학 문화비평 용어사전-문학동네 참고]


시인들에게 회자하는 말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진정성이라는 말이다. 진정성은 진실하고 참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상주의나 초현실주의 등이 진정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대상을 관조할 때 가장 먼저 경계하여야 할 부분이 대상에 대한 진실을 먼저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부분은 객관이라는 점이다. 주관과 객관의 차이는 대상에 대한 보편타당을 획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만의 세계를 통한 한 단계 너머 필터링을 한 것인지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주관의 눈에서는 보이지 않는 너머를 추측하거나 예측하거나 가공의 대상과 또 다른 가공의 생각을 조합하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형성된다. 객관의 눈에서는 내가 아닌, 우리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보편 생각의 일치점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리얼리즘에서는 객관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객관성이 담보된 작품은 공감이라는 영역을 거쳐 독자와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우려하는 소통의 부재가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점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


현실을 벗어난 초현실주의에만 충실하거나 하이퍼 계열의 난해함만을 추구한다면 시는 본연의 서정적 목소리와 표현적 목소리를 가끔 혼동하게 될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자는 말이다. 하이퍼 이전에 대상을 보는 눈이 리얼리즘에 충실하게 현상을 봐야 다음 단계인 초현실적인 경계너머의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역시 색을 먼저 제대로 보거나 공을 먼저 제대로 보는 가감 없는 눈이 있어야 그 다음의 공이나 색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싶다.


시를 쓰거나 읽다 보면 종종 작품의 서두부터 해독하기 어려운 난수표를 보는 느낌이거나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본인이 작품을 쓰고도 스스로 이해 못 하는 작품 속 어휘에 취해(어쩌면 화려한 언어의 조합이나 짜깁기 같은) 멋진 작품이라는 자평을 할 때가 많다. 해독은 독자의 몫이라는 변명을 단서조항처럼 시인과 독자의 마음에 각인한다. 하지만 그 해독이 오독이 되고 오독이 시의 진정성을 해치게 되면 그것은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詩語라는 모호하고 미 정립된 개념에 취해 시를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누누이 강조하지만 시어라는 말을 잘 못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말이 시어이며 세상의 모든 단어와 생각이 시어다. 하지만 교언영색의 관점에서 끌어온 것이라면 그 생각과 단어 모두가 시어는 아닐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리얼리즘은 민낯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가린 표정이나 검은 색안경 뒤에 감춘 서늘한 눈동자가 아닌 누구나 그 표정과 눈동자에 깃든 감정의 깊이를 볼 수 있는 민낯. 시를 쓰기 전 가장 먼저 그 민낯에 주목하고 민낯의 표정에 공감하고 내 민낯과 수평적 교환이 이루어질 때 시는 진정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믿는다.


프로 무용수가 현란한 스텝의 춤을 추게 되기까지 첫걸음에 최선을 다하였을 것이다. 시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운 말은 일상어라는 말이다. 그저 하는 말, 이웃과 주변과 친구에게 하는 말, 그 말 속엔 나와 이웃이라는 ‘우리’의 개념이 존재하고 그 말에 성찰과 생각을 보태 한 편의 ‘시’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이른바 목적을 갖고 시를 쓰지 말자는 말이다. 때때로 어느 곳에 응모하고자 시를 쓸 때가 많다. 필자 역시 무수히 많은 목적을 갖고 시를 쓰기도 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목적이라는 말 앞에 과연 당당할 수 있을까? 목적이라는 것이 전제된다면 이미 그것은 민낯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글이나 생각에서 ‘목적’을 배제해야 한다는 당위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하지만 문장이라는 측면에서, 시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한 리얼리즘의 사조는 가장 먼저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다. 시는 축약의 묘미가 성성한 문학이다. 보이는 대로 만져지는 대로의 기본을 바탕에 두고 하나둘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줄이거나 보태는 작업이 병행될 때 작품이 된다. 시는 일기나 잡문이나 메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낯= 리얼리즘이라는 필자의 우매한 관점에서 볼 때 필자의 논리에 부합하는 도종환 시인의 기고문을 인용해 본다. 다소 필자의 논리와 상충하거나 공감이 부족할 수 있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인용임을 먼저 밝힌다.


[시는 싸우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삶의 얼룩에서 나온다 ]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짧은 안내문이나 편지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면 “아유, 저는 글 못 써요.”하고 정색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글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전문가들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그런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시를 쓰자고 하면 더 펄펄 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인다. 아마 시라는 것이 어렵고 특별한 내용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 암호처럼 주고받는 것쯤으로 생각하지 않나 싶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잘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잘 쓴다는 것 속에는 유식한 말들이 많이 나오고 몇 줄 건넌 한 번씩 어려운 말과 처음 들어보는 구절이 등장하며 화려하고 그럴 듯한 표현들로 이어져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쉽고 진솔하게 써 나가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가 더 진솔한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진짜 이렇게 써도 괜찮으냐는 표정을 짓는다.


글에 대한 그런 편협한 생각을 깬 사람 중의 하나가 김용택 시인이다. 그의 시는 쉽다. 어렵지 않고 진솔하다. 강 마을에서, 학교에서 농촌에서, 살아가면서 접하고 느끼는 삶의 이야기들로 쓰여 있다. 그러나 전혀 어렵지 않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풋풋한 정을 느끼고, 감동을 받고, 김용택 시인이 사는 강변으로 찾아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용택 시인뿐만 아니다. ‘ 노동의 새벽’의 박노해 시인,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의 고재종 시인, ‘인부수첩’의 김해화 시인 ‘공친 날’의 김기홍 시인 이런 시인들의 시도 쉽다. 다 자기들 삶에서 우러난 시들이다. 공장 노동자, 농사짓는 사람, 시내버스 안내양, 철근 다루는 일용노동자, 주부 이런 사람들 중에도 시를 잘 쓰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고등학교 중퇴, 중학 졸업,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사람들도 여럿 있다. 시란 꼭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잘 쓸 수 있다는 통념을 깬 사람들이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시인들이 쓰는 시는 특별한 이야기를 화려하고 아름답게만 장식해 나가는 시어가 아닌 평범한 일상어들로 표현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삶의 진실성과 문학적 진정성을 동시에 얻어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분위기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 속에 생활시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이러한 생활시가 주조를 이루던 생활시 시대가 있었다.

일본의 생활시 이론가 이나무라 갱이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조풍월의 취미가 생활에서 도피하려는데 비해서 생활시가 나가는 방향은 생활에 밀착하려는 태도이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활 가운데 뛰어들어 거기서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참가하려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생활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새로운 생활적인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이 사념하는 것은 근심 많은 이 세상, 더렵혀진 이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거기에 생활시의 근본적인 태도가 근거한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이 영위하는 생활과, 그 인간이 만든 사회와, 인생을 사랑한다. 그것에 부딪쳐 가는 강인한 생활의욕을 희구한다. 우리들은 생활을 속사(俗事)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 속사(俗事)에야말로 시가 있는 것이다.1)

속사, 즉 세상의 이런 저런 일 속에서, 우리들의 때 묻고 남루한 삶의 한복판에서 시가 쓰이는 것이라는 이러한 자각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땀과 눈물과 기쁨과 분노와 고통과 소망,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뒹굴며 살아가는 동안 묻어나는 삶의 얼룩 그것이 시가 되어야 하며 오철수 시인의 말대로 ‘우리의 생활은 우리 시가 사는 보물 상자인 것’2)이다.
다음 시를 보자.


처음엔 남자가 할 짓이 아니라며 짜증도 냈지만

요즘엔 나 스스로 재미가 나서

언제 적 것인지도 모를 신문지를 깔아 놓고는

아내와 마주앉아 콩나물을 다듬습니다

콩나물은 노란 대가리와 흰 뿌리로

신문지 위에서 언제나 의연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니 농산물 개방이니 어쩌구 하는

대문짝만한 일면 기사 위에서나

백억인지 천억인지 그 큰돈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탐욕스런 큰 손 아줌마의 눈빛 위에서나

거리낌 없이 꼿꼿한 뿌리를 쭉쭉 내뻗기도 하고

더러는 몸뚱아리 하나로 먹고 산다는

어느 광고 모델의 요염한 사타구니 사이로

천연덕스럽게 대가리를 디밀기도 하면서

풋풋한 재미를 즐깁니다


돈도 없고 명예는 물론 권세도 남만 못한

이 땅의 교사인 내가

오백 원어치 콩나물을 정성스레 다듬다 보면

콩나물처럼 머리를 맞대고 사는

평생을 살아도 신문 기사에 이름 석 자 오르지 못할

많은 이웃과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걸어 나오고

콩나물만으로도 풍요로울 줄 아는

우리들의 소박한 식탁이 떠오릅니다


욕심을 낼래야 낼 건덕지도 없는

콩나물은 콩나물끼리 뿌리를 얽고는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다듬어 줍니다

마주 앉은 아내와의 사랑이 다듬어지고

이웃들의 정겨운 웃음이 다듬어지고

아이들의 건강한 꿈이 다듬어지고

그렇게 다듬어진 콩나물들은

욕망으로 얼룩진 신문 활자를 당당히 즈려밟고는

싱싱한 우리의 양식이 되어 보란 듯이 손을 흔듭니다

- 장문석 「콩나물 사랑법」전문


이 시는 콩나물을 다듬고 앉았다 쓴 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 짜증나고 답답한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는지 몰라도 이 시속의 시적 화자는 이 사소하고 시시해 보이는(이런 표현 자체가 남성중심 문화 속에서 몸에 밴 습성이고 남자는 그런 일이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의식과 그런 일은 여자나 하는 것이라는 여성 비하적인 삶의 태도가 내면화 되어버린 것이지만) 일을 하는 동안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각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이 땅의 소시민으로 태어나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평범하기 때문에 시인도 될 수 없고 시도 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뛰어넘고 있다.


아니 바로 그 평범한 삶 속에서 삶의 소박한 진리를 깨닫고 있는데 이 시의 미덕이 있다. 콩나물을 다듬기 위해 깔아 놓은 신문지를 보며 대문짝만한 기사들로 연일 채워지는 이 땅의 큰일, 큰일을 만드는 사람들과 ‘콩나물처럼 머리를 맞대고’ ‘평생을 살아도 신문기사에 이름 석 자 오르지 못할 많은 이웃’들의 삶을 비교해 보고 ‘우리들의 소박한 식탁’을 떠올린다. 그러나 결코 주눅 들지 않고 소박한 삶 그 자체에서 더 큰 풍요로움을 느낀다. 물욕과 육욕 그 유혹을 콩나물의 모습으로 깔아뭉개는 여유로운 모습도 있다.


‘욕심을 낼래야 낼 건덕지도 없는’삶의 콩나물 다듬는 작은 일 속에서, 그것도 아내와 마주 앉아 하는 가사일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다듬어 주고’ ‘마주 앉은 아내와의 사랑이 다듬어지고’ ‘이웃들의 정겨운 웃음’ ‘아이들의 건강한 꿈이 다듬어지’는 이런 과정은 얼마나 싱싱한 삶의 활력이 되는가. 삶의 한복판에서 시가 쓰이고 그렇게 쓰인 시가 삶을 가꾸는데 기여하게 되는 이러한 과정이 문학과 삶의 가장 온당한 모습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양정자 시인은 「나의 시」라는 시에서 시가 어떻게 생활 속에서 쓰여지는 것인가를 아주 잘 이야기한 바 있다.


나의 시에는

세 살 다섯 살 된 내 딸, 아들의 떼쓰는 울음소리

눈물 나도록 어여쁜 재롱

내 악쓰는 소리가 섞여 있다

아이들이 떠들고 그림 그리는 옆에서

부대끼며 싸우며 시를 쓰므로

피노키오 파스 색깔

미운 오리새끼, 인어공주의 눈물 몇 방울 떨어져 얼룩져 있다

.........................................

나의 시에는

물 묻은 내 손에서처럼

설겆이질의 야릇한 냄새, 갖은 양념내

걸레 썩는 냄새가 배어 있고...

시는 꼭 아름다운 꽃이어야만 하는가

부대끼며 싸워가며 살아가는

실팍한 생활의 시를 쓰고 싶다



내 시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내 시는 어떤 빛깔이 배어 나올까. 내가 쓰는 시에는 어떤 냄새가 날까. 자기가 쓰는 시의 개성을 생각하며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가장 영롱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운 어떤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양정자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기의 시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 소리는 “딸 아들의 떼쓰는 소리, 재롱소리, 내 악쓰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한다. 시에 빛깔이 있다면 그 빛은 떠들면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크레파스 빛, 동화책을 읽다가 흘린 눈물 빛 그런 빛깔들이 배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자기 시에 냄새가 배어 있다면 그것 역시 설거지질의 야릇한 냄새, 갖은 양념내, 걸레 썩는 냄새 같은 냄새가 배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양정자 시인은 시가 꼭 아름다운 꽃의 빛깔, 꽃의 향기를 지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대끼며 싸워가며 살아가는 / 실팍한 생활의 시” 자신은 그런 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설거지한 손에서 나는 냄새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냄새에서부터 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고 싸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를 가까이 하는 게 아니라 떠들고 싸우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삶의 얼룩에서 시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거기서 실팍한 시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안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가 아니라 속이 꽉 찬 시가 진짜 시라고 믿는 이런 리얼리즘적인 태도가 좋은 시의 밑바탕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유명한 김광규 시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다.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4.19가 나던 해 이십 대 초반 무렵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개인과 사회와 사람과 일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후반부는 그로부터 18년 후 중년의 나이가 되어 모인 그때 그 친구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똑같이 세밑에 만난 친구들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대비되며 지금 우리 부끄럽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자기 반성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유종호 교수는 이런 김광규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김광규의 시 세계는 사회적 경험의 현장을 이루고 있는 생활세계를 향해서 늘 열려 있다......생활세계와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을 줏대 삼아 회전하고 있는 김광규의 시가 일상생활의 낯익은 정경을 리얼리스틱한 필치로 포착하는데 비상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라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속의 대목은 예사로운 듯하면서도 비근한 일상 경험을 일급의 소설장면에서처럼 영속화시켜 놓고 있다....... 흔히 소설의 전문 영역이라고 지목되어온 평범한 일상 생활의 제상諸相이 김광규의 시 세계에서처럼 남김없이 포착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3)




유종호 교수의 말대로 평범한 일상생활의 여러 모습이 남김없이 포착되어 있어서인지 삶의 현장을 향해 열려 있는 그의 시는 읽기에 편하다. 막힘이나 걸림 없이 술술 잘 읽힌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쓴 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편안한 일상어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가 않다.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설명으로 유식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를 읽고 있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런 생활시를 읽으며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정경 속에 자기를 집어넣고 함께 떠들고 이야기하고 걸어 나오다 지금 나의 노래는 밤하늘 별빛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침묵하고 있는가 묻게 된다. 나는 진정 피 흘리며 사랑하던 것들을 잊지 않고 있는가 아니면 늪 같은 생활의 나락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게 된다.



생활시는 단순한 생활의 나열이나 재현이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게 하는 시이다. 삶에서 우러나오지만 시를 통해 다시 삶을 돌아보고 가꾸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는 싸우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삶의 얼룩에서 나온다 -도종환』일부 인용

필자의 글제 소제목인 축약,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세 작품을 선별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시적 관점이 일상이라는 범주에서 조성되고 일상어를 바탕으로 시인의 생각을 조밀하게 구성한 작품이라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첫 번째 작품은 전성희 시인의 [도시는 매일 밀착된다]라는 작품이다. 늘 보던 풍경, 익숙한 풍경이 어느 날 불쑥, 아무 이유 없이, 차 한잔 마시다가 내가 살던 도시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 그 눈이 포착한 이 도시의 거리와 건물의 높이가 스멀스멀 늘어나거나 서로 조밀하게 붙어 있는 것을 느꼈을 때, 도시와 나의 간격, 도시로 통칭하는 현대사회와 시인의 간격, 정작 그리움의 대상은 도시가 아니라는 성찰의 깊이를 공감하게 되는 작품이다.



도시는 매일 밀착된다



전성희



소음은 기온에 맞춰 허공의 음향을 조절한다

층수를 높이는 콘크리트와 철근 사이

서로 바코드를 맞추고

복선의 철로와 맞물려

도로 길 사이 경관을 좁히고 있다



때로는 밀접한 관계로 어긋나고

속내는 뼈대로 삐걱 이며 몸살을 앓는다

고층에 묻힌 주택 건물들의 잿빛 그림자

공사의 표지판은 끊임없이 불어난다



경사진 나무들이 소음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라진 것들은 언제나 추억을 부추기며

사람과 바람이 통하던 그 집을 그리워한다

해마다 꿈이 움트는 나뭇가지 사이로

틈새를 비집고 들어서는 방음벽

거리를 좁히며 자꾸만 밀착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애매한 공사가 밀집된 지역

하루에도 몇 번씩 친밀한 공간을 구성하는

햇살은 자꾸만 고층 사이로 그림자를 짓는다

지금 도시는 그늘진 길이 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단어는 바코드라는 단어다. 바코드는 문자나 숫자를 흑백의 줄무늬로 표시한 기호다. 집합성, 정보성을 모두 가진 어떤 관점에서 볼 때 현대화, 산업사회를 지칭하거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단어다. 바코드 속에 담긴 정보를 통해 입, 출 이 이루어지고 구분되고 개념화되는 것이 요즘의 사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본문 속에 소음/ 허공의 음향/ 콘크리트/철근/이라는 도시를 형성하는 딱딱한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서로의 바코드를 맞춘다는 표현을 했다.



소음은 기온에 맞춰 허공의 음향을 조절한다

층수를 높이는 콘크리트와 철근 사이

서로 바코드를 맞추고

복선의 철로와 맞물려

도로 길 사이 경관을 좁히고 있다



시를 읽으며 바코드라는 단어에서 火印이라는 단어가 연관 검색된다. 화인은 불에 달구어 찍는 쇠로 만든 도장이다. 무엇을? 어디에? 누구에게? 등등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필자 역시 도시에 대한 도시의 밀착화에 대한 부정의 의미 아닐까? 싶다.



도시가 늘어나고 밀착화 된다는 말은 살 곳이 없다는 말이며, 숨을 곳도 쉴 곳도 없어진다는 말이다. 사람의 영역이 아닌 도시의 영역에 사람이 산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의 영역에서는 도시는 부속물이 되지만 도시의 영역에서 사람의 존재는 부속물보다 더 못한 이방인이 되는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친밀한 공간을 구성하는 햇살조차 자신의 발을 움츠린다. 그 늘어선 고층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도시는 그늘진 길이 되고 나면, 정작 사람이 갈 곳은? 전성희 시인의 시는 하나의 보탬도 극적 긴장의 기제도 없다. 주고받는 일상의 모습과 말로 작품을 꾸렸다. ‘바코드’라는 단어 하나로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정확하게 크게 우리에게 던졌다. 필자는 그것을 축약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싶다. 덧붙여 허영숙 시인의 바코드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바코드



허영숙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A4 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쓰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흔 해의 이력을

A4 용지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책상 한쪽 구석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먹다 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줄에 기록된 것은

새우의 함량이라든가 출고 일자 혹은

숫자로 드러나는 가격에 불과할 뿐

비닐봉지 안에 갇힌 공기의 질량이나

내게 오기까지의 경로를 기록할 수 없다

어느 겨울날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한 줄의 좁은 칸에

다 적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나를

이 작은 칸 안에 모두 말할 수는 없다

길 위에서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찍고 간다



『바코드- 혀영숙』전문 인용



두 번째 작품은 홍준표 시인의 [꿈보다 해몽]이라는 작품이다. 살면서 본말이 전도되거나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우선순위라는 같이 각자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삶을 보는 방식에 따라 나름이지만 어쩌면 가장 당연한 것을 우리는 망각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 우선이라는 지엽적 메시지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종종 잊고 사는 당연한 것의 우선순위에 대한 해몽을 의뭉스럽게 작품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꿈보다 해몽



홍준표



어깨띠 매고 교회 일로 분주하던 여자

꿈 하나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설거지를 하는데

남편 밥그릇 새까맣게 변했다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침밥은 제대로 차려줬냐 되물었더니

거룩한 사업 하느라

밥상 졸업한 지 한참 되었다 한다

난데없이 꿈 감별사

뜸 잠시 들였다가 무슨 예언자처럼 목소리 낮게 깔고

거룩한 사업 다 좋은데

남편 밥 잘 챙겨주면

검은 녹 차츰차츰 녹을 거라 들려준 해몽



눈 흘기며 머뭇거리던 그녀는

겁 질려 고개 떨군 저녁 어스름 속으로

해바라기 되어 돌아갔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은 부정의 일을 긍정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인간의 논리적 연상 작용 또는 해석이라는 행위는 어쩌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일 것이다. 환언하면 모든 인과관계는 사람의 정신력과 심리적 영향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을 모습을 남에게도 찾는다. 그것도 매우 정확하게.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은 사람의 속성이지만 타인에게서 자신의 모습, 잊고 있던 자신의 행위와 현실을 자각하게 되기도 한다. 홍준표 시인의 시는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를 친구에게 혹은 집사람에게 말하듯이 구성했다. 일독 후, 그렇구나! 하다가 문득 다시 읽게 된다. 다 아는 이야기로 치부하다 다시 내 모습으로 돌아와 반추하게 한다. 간혹 축약의 의미를 단어와 단어의 상관관계에서만 찾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는 이전에 시어가 아닌 심어의 중요성에 대해 기고를 한 적이 있다. 축약은 현상이나 이야기를 적당히 뭉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로 정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일에 몰두해 남편 밥상을 잘 챙겨주지 못하는 것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사회 전반에 흐르는 비당위성에 대한 자기 생각을 축약 한 것일 것이다. 작은 일상의 이야기에서 시를 맛깔나게 풀어가는 시인의 현명함은 결구에 이르러 정점을 찍는다.



거룩한 사업 다 좋은데

남편 밥 잘 챙겨주면

검은 녹 차츰차츰 녹을 거라 들려 준 해몽

눈 흘기며 머뭇거리던 그녀는

겁 질려 고개 떨군 저녁 어스름 속으로

해바라기 되어 돌아갔다



중요한 부분은 눈 흘기며 머뭇거리던 그녀/ 눈 흘긴다 와 머뭇거리다 사이에 놓인 그녀의 갈등, 그녀의 생각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종종 일탈하는 작금의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누군가의 지적에 우리는 눈 흘기게 된다. 어쩌면 자기방어이며 어쩌면 변명이며 합리화를 먼저 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머뭇거리다 해바라기가 되어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시는 눈으로 읽다 가슴으로 읽게 될 때 가장 좋은 시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마지막 작품은 권상진 시인의 [로댕과 반가사유상]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눈으로 읽다 가슴으로 읽게 되는 작품이다. 로댕과 반가사유상은 동, 서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뇌하고 번민하는 현대인의 자화상 같은 두 작품 사이의 공통점은 로댕은 소목이 저릴 것이며, 반가사유상은 다리에 쥐가 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저린 소목과 쥐가 난 다리에 놓아둔 시인의 삶에 대한 진정성 깊은 성찰적 혜안이 돋보인다.



로댕과 반가사유상



권상진



바닷가 절집을 지나다가

그냥 가기 섭섭해서 담인사나 할까하고

까치발을 서는데 거기

로댕보다 깊은 상념에 잠긴 반가사유상이 있는 거라



생각은 어느 비탈진 바다를 걷고 있는지

그대로 바다를 건너 로댕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있는지

종아리가 당기도록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 거라



로댕은 손목이 꽤나 저릴 테고

반가사유상은 다리에 쥐가 났을 텐데

나는

누가 먼저 자세를 풀 것인지 너무 궁금한 거라



함께 간 친구의 등줄기에 땀이 다 식도록 담에 불어있었는지

이 친구 정신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이러고 있나

며 어깨를 두드리길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생각은 어데 가고 오기만 남은

반가사유상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던 거라



작품의 전면에 흐르는 기조는 현학적이며 해학적이다. 기조가 현학적이며 해학적일 때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시인의 메시지는 반전 이상의 큰 의미를 종종 던지곤 한다. 과연 로댕은 손목이 저리고 반가사유상은 다리에 쥐가 났을 것인가? 필자는 이 작품을 선별하며 필자의 논리에 가장 부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린 손목과 쥐가 난 다리가 리얼리즘이라면 껍데기만 보고 있었던 ‘나’라는 표현은 리얼리즘의 형상화 내지는 리얼리즘의 축약, 리얼리즘의 시적 장르化 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은 어느 비탈진 바다를 걷고 있는지

그대로 바다를 건너 로댕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있는지

종아리가 당기도록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 거라/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생각은 어데 가고 오기만 남은

반가사유상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던 거라/



시가 그런 것 같다. 현상을 보고 있는 나는 현상의 껍질에만 몰두한 채 정신을 놓고 있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진정한 리얼리즘은 현상의 껍질을 정확히 보고, 그것이 껍질인지 속 깊은 내부인지를 구별해 내는 문학적 행위일 것이다. 삶의 전반에 걸쳐 우리가 보고 있던 모든 것들이 껍질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게 된다. 정작 시를 쓰려고 할 때 저린 손목과 쥐가 난 다리에 머물러 정체성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삶이 아닌 시의 본말이 전도된 것은 아닌지? 시적 환상이나 몽환적 현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적 리얼리즘의 실체를 오독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문득,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불가의 가르침이 망무두서한 내 모습에 죽비를 후려친다. 시는 ism에서 벗어 날 때, 아니 ism에 밀착할 때 모두 생명력을 갖게 된다. 허상이 아닌 실체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손목이 저릴때 까지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생각하고 관찰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반가사유상이 제작일로부터 지금까지 온갖 풍상과 더불어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을 그 기간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생각한 그 시간까지, 시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공부를 해야 한다. 적어도 가짜 시인이 아닌 진짜 시인이 되려면.



글- 金離律(詩人, 評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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