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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옆에 작가명을 써 주세요 (예: 작은 위로 / 이해인)

 
 
  
 작성자 : 양현주
작성일 : 2016-01-04     조회 : 1159  



그만큼 (외 2편)

 

문정영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꽃은 양귀비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울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책에서 물소리를 듣다

 

열 권의 책을 빌려 겨우 한 권을 읽고 잠드네.

한 권 속에는 물가에 내려가는 길이 있을 뿐, 물이 햇살을 어떻게 녹이는지 고기들이 소용돌이를 왜 만드는지 알지 못하네.

 

잠 속에서 어제의 해가 죽어야 다른 해가 태어나는 것이라 누군가 흐르는 물소리로 말하네.

 

배 한 척을 빌려 강을 건너나 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네.

 

새벽에 한 권을 더 읽으려 페이지를 넘겼으나 물빛 행간을 건너 뛸 수 없네.

행과 행 사이에 검은 획들이 떠 있네.

물보다 낮게 흐르는 신발은 없고 맨발이 걸어가고 있네.

 

열 권의 책을 다 읽고 물소리를 듣는 눈동자는 없네.

겨우 읽은 한두 권의 책에서 물소리를 들었다 하네.

 

천천히 흐르는 물은 흘러가는 방향을 알리지 않네.

 

 

 

달이 서늘한 문장으로 오는 전생의 내 이름은 삭이었네.

달은 검은 글씨가 쓰인 흰 습자지를 뭉쳐서 만든 것.

생각을 가둔 검은 모자 속에서 당신을 꺼낼 때마다 달빛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나오네.

 

삭, 하고 부르는 소리에 당신의 한 달이 허물어지고 다시 차올랐네.

내 옷깃을 베는 듯 스쳐 지나갔으나 살내음은 오래 머물러 당신의 幻인지 幻의 당신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네.

 

우리는 한가한 복사골을 꽃의 걸음으로 걸었네. 저녁의 손바닥으로 달의 아픈 곳을 자주 들여다보며 나는 당신을 다른 생의 통증으로 만난 것이라 여겼네.

 

한 그릇의 밥을 비벼 반은 전생에 덜어 두고 반은 이 생에서 먹고 있네.

설통에 붙은 꿀벌들을 벌집으로 옮겨도 날아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비벼 서로를 알기 때문이네.

 

그때부터 슬픈 모자를 삭이라 불렀네.

 

—시집『그만큼』(2014)에서

 

문정영 /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건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낯선 금요일』『잉크』『그만큼』. 현재 시 전문 계간지 《시산맥》발행인. 이메일 kfbmoon@naver.com

 

[한국NGO신문] 이경 기자 = 시산맥사에서 문정영 시인의 신작 시집 '그만큼'이 2014년 9월 309일 발간되었다. 문정영 시인은 1959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낯선 금요일' '잉크' '그만큼'이 있다. 현재 시전문지 계간 '시산맥' 발행인이며 2013년 아르코 창작 기금 수혜했다.

사람에게 유심해지는 적막이 있다면, 현상으로서의 적막과 다스려진 속종으로서의 적막이 있겠다. 이런 소슬한 적막의 분위기는 자연(自然)과 인위(人爲)로 서로 두동지게 나눌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적막의 자연을 알아볼 요량이면 그 마음이 적막을 가만히 살아볼 줄도 아는 게 사람의 마음자리일 때도 있다.

여름철 큰물에 상류계곡의 바위가 큰 짐승처럼 떠내려올 때는 두려움이 성큼성큼 가슴을 덮칠 것만 같다. 그러다가도 개인 날 계곡 언저리에 엎드려 햇빛을 받는 바위는 유순하기 이를 데 없는 순둥이의 슬픈 덩치로 다가들기도 한다. 사물과 풍경, 아니 그런 세상에 어울려 사는 사람이면 어찌 한 표정만을 간곡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표리(表裏)의 인간사(人間事)를 되새기다보면 그날로부터 사물의 그늘은 어둑한 것만도 아니고 요령부득의 것만도 아니며,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소슬한 내면의 계절을 열게 된다. 그 계절에는 새로운 자아(自我)가 들락거리는 고요한 발소리도 돈독해진다.

나의 수수한 움직임은 나의 소박한 실존으로 도드라질 기미(幾微)를 열어준다. 꽃잎이 벌어지듯이 생각에 오롯한 인상의 주름이 생기니 이 또한 가만히 두고 보다가 이내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는 계제를 마련한다. 나비나 벌이 한 꽃에 닿고자 할 때 그 멈춤의 바람도 있는 것이다.

부는 바람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멈추는 바람을 보는 것은 실존적 인상이나 이미지를 얼러내는 기미(幾微)를 가질 수 있다. 이제 그 가만한 기척에 화답하듯 섬세하게 반추하는 시간을 그의 시들은 다양하게 모색하는 분위기다.

문정영에게 있어 작금의 시들은 잘 읽혀지지 않던 사물들의 기미와 서슬이 유난스러워지는 내밀한 기척들로 내면의 물소리가 쌓인다. 그 물들은 이제 단순한 반영을 넘어선 소슬한 존재에의 관여라는 지경에 물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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