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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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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12 09:3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742  

시의 부활을 위하여

 

이재무

 

왜 시가 읽히지 않을까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로는 내외적 환경 변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외적으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첨단 문화 매체에 의해 우리 나날의 일상이 전 방위적으로 포섭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하루 한시도 인터넷과 휴대전화에서 떨어져 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은 게임에 빠져 지내기 일쑤고 장년층들도 카톡, 페이스북, 트윗 등 SNS에 의존하지 않고는 나날의 무료를 견뎌내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전자 사막시대를 살아가는 현대판 유목민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며 각종 전자 기술 매체를 통해 타자와의 교감과 소통을 꿈꾸고 기대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양말을 신은 채 가려운 발등 부위를 긁는 일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불통과 소외의 가려움을 해소할 수 없다. 요컨대 시가 독자 대중에게서 멀어진 이유는 이처럼 전자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삶의 권태를 일시적으로 배설할 뿐, 진중하게 앉아 책을 읽고 공감하며 사색하는 일의 수고로움을 기피하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내적 원인으로는 시인들의 시작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소통 불능의 자폐적 언어로 자기들만의 성채 안에 들어가 끼리끼리 암호를 주고받듯,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작동되는 현재의 소통 체계가 독자들의 시에 대한 흥미를 휘발시켜 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재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분재란 엄밀하게 말해서 장애수이기 때문이다. 왜 개인의 취향과 기호 때문에 멀쩡한 나무에 위해를 가해 장애를 만드는지 도통 그 가학 취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시작에서도 나는 이런 현상을 본다. 언어를 분지르고 비틀고 학대하여 장애어를 만드는 현상이 소통 불능의 시를 낳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좋은 시란 시상의 자연스러운 유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난해 시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해 시도 궁극적으로는 독자의 이해에 가 닿아야 한다.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의 자격을 상실할 수밖에 없듯이 끝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는 시로서 자격을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시란 무엇인가》의 저자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리면 아무리 수수께끼의 난도가 높다 하더라도 거기엔 답이 들어 있어야 비로소 수수께끼의 자격이 있듯 난해 시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소통이 이루어져야만 시의 자격이 있다. 난해 시가 양산되는 배경에는 전위적 실험을 추구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시인이 언어를 장악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시에서 비문이 더러 비평가들의 상찬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문제이다. 비문의 남발이 시의 덕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시의 효과를 위해 우리는 흔히 ‘시적 허용’이라 하여 일부러 문법을 창조적으로 일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사용해야지 이것이 시 진술의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시인의 자질을 알려면 그가 쓴 산문을 읽어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것은 시인의 국어 사용 능력을 불신하기에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말이 길어졌지만 이런 내외적 이유로 인해 독자 대중으로부터 시가 멀어졌다고 생각되기에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독자들 또한, 전혀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이 대목 역시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려 필자의 의견을 피력하자면 우리의 현실 독자들은 시와 친해지기 위한 지적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시가 어렵게 느껴지면 무조건 시인을 탓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가령 물리학이나 고등수학, 추상미술이나 고전음악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무지를 탓한다.

그러나 시가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탓하는 대신 시인들을 타매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시도 향수할 수 있으려면 지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우리는 스포츠 관전을 하기 위해서도 스포츠 ‘룰’을 알아야 한다. 룰을 모르면 모른 만큼 관전의 쾌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다. 시 역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려면 시에 대한 최소한의 ‘룰’ 즉 이미지, 어조, 비유, 상징, 신화, 반어, 역설, 패러디 등등 시의 구성요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숙지는 필요하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얼마 전 나는 ‘왜 일반 대중이 시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각자의 의견을 달라는 요청을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띄운 적이 있었는데 꽤 많은 호응이 있었다. 중복되는 것을 빼고 나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남았다. 올라온 내용들을 그대로 옮겨본다.

 

1) 시에는 깊은 성찰과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은 물론 이웃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담겨 있다. 시는 사물과 사물 간의 관계를 맺어줌으로써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시의 아름다움은 그 시가 지닌 영혼의 깊이와 폭에서 나온다. 아름다운 단어를 단순히 나열한다고 해서 시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시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낯선 것들을 결합시켜 전혀 다른 모습을 새롭게 보여준다.

 

시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세상과 생의 살아 있는 표정을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여 가장 적절한 형식에 담아낸다. 기발해 보이는 착상도 깊은 사색과 폭넓은 성찰을 통해 얻어진다. 우리는 더욱 풍성한 세상을 만나고자 나아가 더욱 진실하게 세상 사는 법을 배우고자 시를 읽는다. 시를 통해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받고 순수한 인생을 되찾고자 시 감상을 하며 보다 성숙된 인생을 꾸려 나가기 위해 시를 읽는다.

시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 가능하고 신화적 신비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드라마나 소설 영화 같은 장르보다 정서를 표출하기에 훨씬 좋다. 우리는 시 감상을 통해 심리적으로 대리만족과 대리배설이 가능하며 자기와의 화해 및 세계와의 화해를 이루기 위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시는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세계를 열어둠으로써 상처를 아물게도 한다. 시는 잃어버린 사랑을 목 놓아 울어버리고 그 울음을 안으로 삼킨다. 시는 슬플 때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며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새어나오는 흐느낌이다. 시는 그 상처를 새로운 불씨로 삼아 나아갈 곳을 찾는다. 홍역처럼 심하게 앓았던 첫사랑의 상처도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시나 그 아픔을 위로해주는 시들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시는 우리를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이끈다. 사랑의 아픔을 어떻게 안으로 삼키고 키워나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심하게 앓았던 첫사랑의 상처가 한 편의 시로 말미암아 치유될 수 있으며, 첫사랑의 그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빌 수 있게 된다.

 

2) 마음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

3) 시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4) 시는 무질서한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5) 시를 읽으면 마음이 자란다.

6) 시는 일상이고 끼니와 같은 것이다.

7) 우리는 보통 ‘바라보기’라는 말의 목표를 밖에 두는데 나는 나를 바라보는 데 뜻을 둔다. 시가 그렇다. 시에 있어 모든 세상 바라보기는 일차적으로 따뜻한 시선이어야 한다.

8) 시 속에 사람이 있고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9) 시를 쓰는 시인은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처럼 대체 불가능한 유일의 적정어를 선택하기 위해 거듭 생각에 골몰하고 노력한다. 그렇게 창작된 시가 영혼을 정화하기 때문이다.

10) 언어에 대한 미적 감성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언어의 미적 감성이 길러지면 소통 수단인 언어를 훨씬 더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사람들 간의 이해와 연대에도 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11) 힘겹고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 시를 찾게 된다. 척박한 시대에 시를 함께 나누는 이들과 체온을 나누면서 견디는 힘을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12) 시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고백이다. 시문학이 아니라면 그 숱한 고백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차마 하지 못하는 나의 고백을 대신 해주는 것이 시(시인)이고 그 시를 읽으면서 내면을 응시하고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13) 우리의 어린 시절은 시의 형식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시 내용을 생활로 누릴 수 있었다. 멍석 위의 식사며 라디오로 듣던 드라마, 개천에서 물장구치며 물고기 잡던 나날들이 바로 시였다.

14)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그른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라고 다산 선생이 말씀하셨다. 시인은 그 시대 아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작동하는 인간이다. 시인이 죽은 사회는 이성이 묻혀버린 공동묘지일 뿐이다. 국민이 시를 봐야 한다는 것은 이성의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시인을 감시하고 지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시인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조만간 관을 준비해두고 시를 써야 할지 모른다.

 

여기에 나는 더 덧붙일 말이 없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반 독자들은 시에 대한 효용성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다. 시가 나날의 고투에 위로를 줄 수 있고 나아가 정신의 피로에 대한 치유까지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시에 무한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우리 시인들은 과연 어떠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을까?

 

나를 비롯해 이 땅의 시인들은 한번 심각하게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들이 줄고 있다’ ‘시의 시대가 사라졌다’고 비명과 엄살만 떨 게 아니라, 독자들에게 울림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시편을 쓰기 위해 과연 우리가 얼마나 애써왔는가를 먼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요즘 너무 많이 양산되는 매체 때문인지 시들이 지나치게 남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드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시란 음식으로 치면 발효 식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정서를 충분히 숙성시킨 연후에야 시작에 임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경향들은 너무 날것의 생경한 이미지 남발과 과도한 비유의 배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심히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오래전 바다 건너 마을에 살았던 한 유명 시인의 시에 대한 태도에 잠깐 눈과 귀를 기울여보자.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려면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지역의 길, 뜻밖의 만남, 오랫동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본 이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 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기분을 언짢게 해드린 부모님들(다른 사람이라면 기뻐했을 텐데), 심각하고 커다란 변화로 인해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질병, 조용하고도 한적한 방에서 보낸 나날들, 바닷가에서의 아침, 그리고 바다 그 자체, 곳곳의 바다들, 하늘 높이 소리 내며 모든 별과 더불어 흩날려 간 여행의 밤들!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같이 다른, 사랑을 주고받는 수많은 밤들, 진통하는 임산부의 외침, 가벼운 흰옷을 입고 잠을 자는 동안 자궁이 닫혀 가는 임산부들에 대한 추억도 있어야 한다. 또 임종하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 봐야 하고, 창문이 열리고 간헐적으로 외부의 소음이 들려오는 밤에 시체 옆에도 앉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추억만으로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시 한 편을 직조하기 위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심사에 숙고를 거듭하며 여간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시 정신으로 만든 작품이라야 비로소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특유의 성급한 정신이 시에까지 침투되어서야 하겠는가? 너무들 서두른다. 혹시나 잊히지나 않을까, 혹시나 시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과 초조가 작품의 양산을 부채질한다. 요컨대 시단에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래서는 질 좋은 작품이 나올 리 없다. 독자들에게 시 읽는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서 우선 시인들부터 시 창작에 대한 비상한 열의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시인으로서 꿈꾸는 세상

 

이제 나는 더 이상 문학이 사회 변혁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더는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나는 지난 연대처럼 문학이 사회 변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어리석은 맹목의 계몽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문학이 자신들만의 자폐의 성 안에 갇혀 자신들만의 축제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너무 많은 분열로 넘쳐 나고 있다. 남과 북의 오랜 반목과 대립에서 연유된 갈등과 분열의 양상은 이후 남남갈등으로 번져, 갈수록 그것을 심화시키고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즉 갈등과 분열이 사회구성원에게 내면화되어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갈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갈등은 때로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여 삶과 생에 동력을 실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은 시인의 지적처럼 우리의 경우는 갈등에 굳은살이 박여 있다는 점이 문제다. 활력이 아닌 경화는 결코 사회적 생산을 이룰 수 없다.

 

시인으로서 시인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은 갈등과 분열로 갈가리 찢긴 불모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에 주의하고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관심의 표명이 불화와 불신과 불통을 해결하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이, 시가 여전히 그런 역할에 일정 부문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전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말이다. 시인으로서 내가 꿈꾸는 세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삶에 최소한의 안전망이 구축된 세상, 사회적 약자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자유롭게 발언하고 호소할 수 있는 세상,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극단의 대결의식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서 민족이 공존하고 공생하는 길을 도모하는 국가적 분위기, 계층과 지역과 세대와 남녀 간의 불통이 해소된 세상, 이념의 차이로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 세상, 차별이 없는 세상, 실패한 가장과 청소년을 자살로 내몰지 않는 세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없는 세상, 일등만 기억하는 승자 독식이 없는 세상, 사교육비 부담으로 결혼을 기피하지 않는 세상, 어느 정치인이 내세운 슬로건처럼 ‘저녁이 있는 삶’, 취직 퇴직 걱정이 없는 세상…… 희망 사항을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시가 무슨 요술방망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나라 살림을 맡은 이들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일들을 어찌 시가 감당할 수 있다는 겐가?’ 하고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만도 하다. 감당하자는 게 아니다. 이것은 가당치도 않고 또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시가, 시인이 이러한 일들에 작으나마 관심을 표명하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시대의 지진아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가 잃어버린 독자들을 되찾은 길은 당면한 우리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자폐의 골방에서 빠져나와 거리와 광장으로 시가 걸어나갈 때 멀리 떠나갔던 독자들이 되돌아올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올해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신춘문예의 관문을 통과한 자랑스러운 신예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부디 초심을 잃지 말고 매 순간 시에 정진하시어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기 바란다. 시작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이해에 대한 통찰의 한 계기를 열어주었으면 한다. 또한 독자와 따로 놀지 말고 그들과 함께 이웃하고 연대하는 시인으로서 삶을 살아가 주기를 바란다. 여러분보다 단지 먼저 시작한 것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 없는 선배로서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유심》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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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섣달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벌초』『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푸른 고집』『저녁 6시』『경쾌한 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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