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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28 12:21
 글쓴이 : wooj
조회 : 214  

프롤로그. 

  아쉬운 발걸음이지만 후회는 없다. 막 한 달 간의 유럽여행을 끝낸 신혜는 동네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짐을 싣고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버티는 삶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추억이 있으니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난 언젠가 또 다시 세상을 향해 떠날 것이므로, 라고 신혜는 생각했다. 신혜의 빈 옆 좌석에는 친구들을 위해 잔뜩 사온 선물들이 담긴 가방이 동행자처럼 앉아 있었다. 가방은 로마의 골목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스카프와 런던의 빈티지 마켓에서 산 컵이라든가 옷 등으로 가득했다.

  까무룩 잠이 들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2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짧은 잠이었지만 좋은 잠이었다. 아직 동네에 도착하려면 버스는 10분 정도를 더 달려야 했고 신혜는 목 스트레칭을 두어번 한 후 다시 버스 의자에 몸을 기댔다.

  글은 무엇일까, 창문으로 스쳐가는 오후의 풍경을 바라보며 신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5년 전, 신혜는 글을 포기했다. 글에 대한 재능이 없어서, 가 이유였지만 그건 핑계였다. 신혜는 글이 무엇인 지 답을 내릴 수 없었고 그래서 글을 쓸 수 없었다. 이것이 신혜가 펜을 내려놓은 진짜 이유였다. 글쓰기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신혜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사는 대신에 글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사람들에게 공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포하지 않으면 자신이 글을 절대 놓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약하니 사람들의 시선을 빌려야만 했다. 다시는 자신이 글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신혜의 엄마는 그 사실을 매우 아쉬워했다. 신혜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은 모두 자신들 중에 작가가 될 만한 사람은 신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혜는 친구들이 말하는 작가가 될 만한 사람이 가지는 자격이 대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만이 신혜에게 명확할 뿐이었다.

  버스가 동네에 도착했다. 서울의 변두리. 작은 동네였다. 친구들은 굳이 도심을 빠져나가 그런 곳에 사는 신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신혜는 자신의 동네를 사랑했다. 도심으로 가고 싶으면 언제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되었다. 신혜의 동네는 도심보다 조용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그래서 신혜는 촌스런 이 변두리 마을을 사랑했다.

  작은 언덕을 올라가자 신혜의 카페가 보였다. 예원동 커피집, 신혜가 운영하는 카페였다. 노을이 지는 시간, 예원동 커피집의 따뜻한 노란색 조명이 작은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딸랑, 신혜가 가게 문을 열자 풍경이 울렸다.

  "언니!"

  테이블을 정리하던 윤아가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신혜에게 달려왔다. 예원동 커피집의 오랜 직원이었다.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윤아가 신혜를 안고 방방 뛰며 말했다. 신혜는 윤아를 안고 몇 번 등을 토닥였다. 잘 다녀 온 거냐, 재미있었냐, 사진은 많이 찍어왔냐, 어디가 제일 좋았냐 등의 질문이 윤아에게서 끊임없이 쏟아졌다. 신혜는 배낭과 선물 가방을 직원용 테이블에 올려놓고 선물보따리를 풀었다. 꺅, 가방 밖으로 나오는 물건들을 보면서 윤아는 비명을 질렀고 함박 웃음을 지으며 신혜를 좋아 죽겠다는 듯 안아 젖혔다.

  "이건 스카프, 로마에서 산 거. 이건 빈티지 블라우스랑 귀걸이, 윤아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그리고 이건 바르셀로나에서 산 수첩, 이건 빈티지 그릇, 엄청 예쁘지? 마지막으로 이건 스위스 초콜릿."

  "언니 너무 좋아요 저 지금 엄청 행복해요." 윤아가 블라우스를 몸에 대보며 방방 뛰었다.

  "나 없는 동안 혼자 가게 보느라 고생 많았어."

  "에이, 아니에요. 솔 언니가 오셔서 많이 도와주셔서 괜찮았어요."

  헤, 하고 윤아가 웃었다. 윤아는 신혜의 대학 후배였다. 신혜보다 두 학번 아래의 윤아는 문학제에 제출했던 신혜의 시에 반해 신혜를 졸졸 쫓아 다녔고 급기야는 신혜가 예원동 커피집을 열었을 때 열혈 알바생이 되겠다며 신혜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 4년째, 윤아는 성실하게 신혜를 도왔다. 신혜가 여행을 다닐 수 있던 것도 다 윤아의 도움 덕분이었다.

  "언니, 피곤하지 않으세요? 얼른 올라가서 쉬세요."

  "아냐, 아냐, 괜찮아. 오늘 마감은 내가 할게. 윤아 일찍 들어가. 집 들어가는 것도 시간 걸릴 텐데."

  "정말요? 여독 푸셔야죠."

  "지금 쉰다고 여독이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한 달 동안 고생 너무 많았잖아. 그리고 이따가 솔이 퇴근하면 좀 도와달라고 하지 뭐. 얼른 들어가, 얼른."

  "우와...감사해요 언니. 태호한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해야겠어요. 선물 자랑 좀 해야죠."

  "그래 그래. 지금 챙기고 들어가."

  "오예, 네 언니!"

  재빠르게 스태프 룸에서 짐을 챙기고 나온 윤아가 언니, 그럼 내일 봐요, 라고 손을 흔들며 커피집을 나섰다. 신혜는 앞치마를 매며 윤아에게 답인사를 했다. 저녁 6시가 넘은 시각, 곧 있으면 솔이 퇴근할 것이었다. 윤아의 모습이 언덕 밑으로 사라지자 신혜는 배낭에서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주기 위해 사 온 초콜릿 박스들을 꺼내 냉장고에 정리하고 중고서점에서 사 온 서적들을 꺼냈다. 모두 여섯 권이었다. 마음 같아선 책을 더 사오고 싶었지만 욕심을 부렸다간 배낭을 멘 어깨가 남아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떠났던 미국 여행에서 신혜는 책을 10권 이상 사오는 무지막지한 실수를 저질렀고 미국에서 한국까지 책을 가져온 후에 신혜는 몸살이 났던 것이다.

  신혜는 다섯 권의 책에 분류 라벨지를 붙이고 분류한 내용에 따라 커피집의 한쪽 벽면 전체에 놓인 책장에 책을 꽂았다. 그리고는 가게에서 늘 사용하던 검은색 종이에 "새로운 책, 들어왔습니다. :)"를 써 가게 문에 붙여놓았다. 이처럼 신혜의 예원동 커피집은 책을 빌려주는 곳이었다. 카페는 신혜가 골라온 책들이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바코드 대신 신혜는 손으로 도서출납을 기록했다. 이것이 신혜가 글을 쓰는 대신 선택한 일이었다. 책을 빌려주고, 책을 소개하며, 때로는 커피를 만드는 사람, 신혜는 이 삶을 선택했다.

 

  '도착했니.' 카톡 알람이 울렸다. 솔이었다.

  '당연하지, 지금 가게.'

  '오키. 나 5분 후 도착.'

  솔을 기다리며 신혜는 진하게 커피 두 잔을 내렸다. 카페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솔은 퇴근 후에 마시는 커피를 좋아했다. 신혜는 저녁에 커피를 마시면 분명 잠을 못 잘 게 뻔했지만 오랜만에 가게에 돌아온 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공간에서 늦게까지 책을 읽고 싶었다. 또 만약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는 손님이 있다면 오래도록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어떤 인생의 이야기일 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딸랑, 솔이 들어왔다.

  "왔어?"

  솔이 신혜를 꼭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윤아랑 해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너 없인 가게가 잘 안 돌아가."

  "도와줘서 고마워. 일 끝나고 도와주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 정도야 뭐, 그대가 사오는 선물로 충분히 보상이 되지요."

  신혜는 솔의 말을 듣고 히히 웃었다. 그리고 윤아에게 한 것처럼 유럽에서 사 온 선물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솔은 선물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초콜릿 박스를 열고 있었다.

  "커피도 내려놨어, 같이 먹어."

  "오예."

  솔은 직원용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초콜릿과 커피로 호사를 누리기 시작했다. 음, 이 맛이야, 피로가 풀린다 풀려, 솔은 끊임없이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좋아?"

  신혜가 묻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은 신혜의 대학교 동창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만났던 동기들 중 솔은 신혜와 가장 죽이 잘 맞았고 신혜가 예원동 커피집을 차리며 인수한 2층 건물의 2층에서 신혜와 같이 살고 있었다. 솔은 호탕했지만 섬세했다. 신혜는 솔의 그 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끄으, 이제 그만. 이 정도면 됐어. 나머지는 남겨뒀다가 회사에 가져가서 지옥 같은 박부장이 나를 죽이려 들 때마다 하나씩 먹어야지."

  솔의 말에 신혜가 킬킬 웃었다.

  "올라가서 씻고 내려와."

  신혜의 말에 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피곤하지도 않니, 나 같으면 가게 문 닫고 쉴 텐데. 나 올라가는 김에 이거 짐도 갖다 둘까?"

  "오, 그럼 완전 땡큐지."

  "헐, 근데 이거 엄청 무겁네? 어떻게 들고 왔어?"

  솔이 낑낑거리며 신혜의 짐을 날랐다. 솔이 올라간 후 신혜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폈다. 그리고 한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딸랑,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신혜가 반사적으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신혜가 유럽에서 돌아온 후 첫 손님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보는 표정, 오랜만에 만나는 옛 손님은 아니었다. 신혜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데에 재주가 뛰어났고 지금 들어온 사람은 분명 신혜의 가게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었다. 성별은 여자, 중간 정도의 키, 20대 후반처럼 보였으며, 패션 감각이 뛰어났다.

  "저기..."

  "네, 손님."

  신혜가 여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혹시...여기 바 테이블에 앉아도 되나요?"

  "네, 편하신 데에 앉으시면 돼요."

  여자가 쭈뼛쭈뼛 카운터 앞에 길게 놓인 바 테이블에 앉았다. 여자의 눈과 마주 선 신혜의 눈이 부딪혔다. 여자는 민망하다는 듯 신혜의 시선을 피하며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주문했다. 신혜는 웃으며 네, 라고 대답한 후에 익숙하게 커피를 내렸다.

  힘들어 보여, 신혜는 생각했다. 피곤해도 보여, 또 생각했다. 신혜는 찬장에서 아이보리색 바탕에 작은 노란 꽃들이 그려진 자기컵과 컵받침을 꺼내 커피를 부었다. 그리고 흰색 바탕에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물결 모양의 작은 그릇을 꺼내 조금 전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스위스 초콜릿 두 조각을 올렸다. 나무 쟁반에 담아 손님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말했다. 애정을 듬뿍 담아서.

  여자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두 모금, 마시고, 세 모금, 마셨다. 허공을 응시하던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여자를 바라보던 신혜는 당황했고 이윽고 여자의 눈에서 또 눈물 한 방울이 툭, 또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저기..."

  "네, 손님."

  "이야기를 들어주신다고 해서 찾아 왔는데요...사실 제가 집이 여기가 아니거든요...근데 얘기를 들어주신다고 해서요..."

  "아, 네, 손님."

  신혜가 여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혹시 제 얘기도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손님, 말씀하세요."

  신혜가 직원용 의자를 끌고 와 바 테이블 사이로 여자를 마주보고 앉았다. 오늘의 첫 손님, 한 달 간의 여행 후 첫 손님이었다. 신혜는 마음이 두근거렸고 동시에 슬퍼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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