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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11 14:05
 글쓴이 : 이영균
조회 : 85  

가을 같은 그녀/ 이영균

 

 

 가을의 들녘이 누렇게 물들어 오면 가슴팍을 파고드는 스산한 바람 같은 멍하나 자리하여 괜스레 오래된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 갓 스무 살의 풋사랑, 어느덧 떠올라 멀쑥하던 기억에 얼굴이 붉어진다.

 

 1973년 나는 교회에서 시행하는 봉사단에 자원하여 6주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6개월간의 주어진 임기를 다하기 위하여 한 조가 된 대원들과 함께 임지인 경상남도로 떠났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경상남도 밀양이었다. 그곳은 나라에 우한이 있을 것 같으면 먼저 땀을 흘려 조짐을 알려주었다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셨던 사명대사의 동상이 있었으며 정조를 지키려다 죽어갔다는 아랑이의 억울한 설화가 어린 아랑각과 전 국토를 통틀어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삼대 누각 중의 하나라는 영남루 등이 있는 충절과 고전이 살아 숨 쉬는 멋스러운 고장이었다.

 

 두 번째 임지는 천 명의 제자들이 먼 중국에서 원효대사의 설법을 듣고자 찾아왔다 하여 이름을 내원이라 하였다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내원사와 맞은편 산의 비구니 스님들만 수도한다는 통도사가 있는 양산이었다.

 

 그다음 부산, 김해, 진해, 마산, 고성, 진주, 사천, 남해, 하동, 산청, 합천 등을 두루 거쳐 경남을 일주하였는데 그중 섬진강 포구 팔십 리가 장대하게 펼쳐지는 전남과 경남의 경계 지이자 유명사찰인 쌍계사가 있는 하동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느덧 계절도 가을로 바뀌어 가고 있어 거리엔 가수 김상희 씨의 <코스모스 피는 길>이란 노래처럼 코스모스가 한창 피어있어 가을의 정치를 물씬 풍기고 있었는데 나는 생전 처음 집 떠나 맞는 객지에서의 가을이라 무척이나 쓸쓸하고 당황스러웠다.

 

 누런 벼 이삭 위로 짜르르 불려가는 가을바람이며 스산한 고독의 채색이 더욱 짙게 물들어 가는 들녘이며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계절의 쓸쓸함을 애써 쓸어안고 졸고 있는 고추잠자리며 모두 구월이 되자 무더웠던 8월의 열대야가 그리워질 만큼 계절을 차갑게 끓고 가고 있는데 날갯죽지가 처진 새인 양 축 처져있던 차에 홀로 농가에 대민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하동읍에서 출발하여 얼마 후 다다른 곳은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라는 곳이었다. 바닷물이 역류하는 장장 80리의 포구가 절경을 이루는 섬진강 변 그곳은 소설과 같이 끝없이 펼쳐진 황금 들판이었고 그곳에는 가을의 햇살이 그 벌판에서 날 쌀알처럼 싸락싸락 쏟아져 내렸다.

 

 벌판을 지나 두 주먹만 한 홍시가 눈길을 잡는 야산의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옹색하고 작은 다랑논에서 헐렁한 몸뻬를 입은 아낙네 서넛이 벼를 베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이분들을 좀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논바닥에 접어드는데 이심전심이랄까 그중 한 아낙이 이리오라고 손짓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참 때라며 막걸리나 한 사발 먹고 가란다. 하지만, 술을 못 배웠을 때라 새참인 갈치 장국 한 그릇을 마시듯 후딱 먹어치우고 일을 좀 도와드리겠다고 하고는 서툰 낫질을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손바닥엔 물집이 잡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구슬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였다.

“더운데 물 좀 드시면서 쉬엄쉬엄하세요.”

하는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리를 펴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더니 뜻밖에도 그곳엔 아직 학생인 듯한 처자가 하늘이 비칠 듯 맑은 물그릇을 내밀며 수줍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눈에는 뽀얀 얼굴에 아직 어리게만 보이던 도회지 총각의 서툰 낫질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목이 타던 참에 반갑게 물을 받아 단숨에 마시고 나서 이마의 땀을 씻어내는데 그녀가 가을 햇살에 한 송이 국화처럼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나일론 몸뻬를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속살이 비취도록 유난이 햇살의 투시가 심했다. 노란 들국화 꽃무늬 속의 비췰 듯 말 듯 한 맨살은 사춘기 때 시집가던 이웃집 누이의 백옥 같은 젖무덤 얼핏 스쳐본 이래로 처음 느껴보는 야릇함이어서 싱숭생숭하였다.

 

여우에 홀린 듯 홀딱 빠졌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때문에 다섯 시까지만 돕고 처소로 돌아갔어야 할 것을 까맣게 잊고 해 지도고도 돌아가지 못했다. 덕분에 그 많은 벼를 다 벨 수 있었다며 그녀의 어머니인 듯한 아주머니가 저녁을 먹고 가란다. 시골길이고 초행길에 버스까지 끊어져 처소로 돌아가는 것이 막막하기만 했는데 내심 잘되었다 싶은 건 왤까?

 

하던 일을 갈무리하고 그들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는데 남자가 없는 집이어서 그랬을까? 그 집 울타리는 가시가 촘촘한 탱자나무였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보는 순간 마음속의 엉큼한 생각이 가시에 찔린 듯 뜨끔뜨끔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아주머니가 과일을 내왔다. 과일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뜻밖에 그녀는 서울 총각인 내게 관심을 보여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둘은 서로 소식을 주고받기로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녀의 주소와 사진도 한 장 건네받았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둘은 그 이후 제대로 된 소식 한번 변변히 주고받질 못했다. 심지어는 이처럼 당시의 기억들이 생생한데도 그렇게 야릇한 감정까지 느껴본 그녀의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 계절의 느낌처럼 참으로 한 토막 꿈결 같은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어느새 들판의 트랙터가 붉은 해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혹시 그 야릇하던 나일론 몸뻬 속 그녀의 다리맵시는 지금쯤 저 트랙터처럼 억센 몸매로 변하진 않았을까. 아니면 지금도 코스모스처럼 목선이 낭창낭창한 고풍의 귀부인이 되어있지는 않을는지? 저무는 저 황홀한 노을빛처럼 오래된 그녀와의 기억들이 나풀나풀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이 저녁 아직도 내 속의 청년은 탱자나무 울타리 집 그녀에게로 가고 있다.


전영란 17-08-12 21:20
 
ㅋㅋㅋ
시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상속에 가지고 있으니 아름다운 겁니다.
첫사랑 참 많이 상상하고 기대했습니다.
막상 만났는데
배는 툭 튀어나오고 목은 축 쳐지고 중년 남자를 보고 기절할 뻔 했습니다....
그 다음부턴 그리움이 싹 사라졌답니다.........ㅎㅎㅎ
가을 같은 그녀// 찾지 마시고 계속 그리워하십시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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