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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05 00:23
 글쓴이 : 김용호
조회 : 364  
그저 평범한 어느 봄날

물 준 일밖에 없는데.
빈 가지로 겨울을 난 남천과 철쭉이 잔가지에 잎을 틔우고,
사랑초와 앵초가 힘껏 환한 꽃을 피워내고 있다.
돈나무의 반짝이는 잎 가장자리에도 작디작은 새순이 도르르 말려
펼칠 날을 기다리고. 키워진 화초 사다가 공들여 옮겨 심지 않아도
올봄 우리 집 작은 거실은 풍성한 정원이 되어있다.
봄은 언제나 오는 듯 가는 듯 실없이 기웃대다가 여름에 넘기듯,
빼앗기듯 그 자리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듯싶어도 피는 꽃들을 보면
봄은 분명히 왔다가 분명히 간다.
꽃이 피고 지는 분명함 같이 내가 읽는 책들도 그렇게 분명한
줄거리로 입력됐으면 좋겠다.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어 읽는 책 상관없이, 앞줄 읽고 다음 줄에서
그 내용 잊어버릴지라도 요즘은 재미없는 책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화분에 물 스며들 듯 읽는 책들의 이야기가 내 안에도 그렇게
고스란히 스며들면 얼마나 좋을까.
스며들어 오래도록 머물면 좋겠다.
촉촉이 물 머금은 화분들 옆에서 오전 내내 책과 동무를 했다.
시장갈 옷차림은 아니고 곧장 귀가하기도 뭣해서 예술회관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느 분의 고희기념 사진전 현수막이 크게 걸린 전시장을 먼저 들렸다.
모 신문사 발행 비매품 책을 몇 단계를 거쳐 손에 쥐고
귀가하려는 길이었다.
무언가에 빠지면 나이를 잊는 것일까. 동문회를 비롯해
몇 개의 화분에 이 쓰인 것을 보면 우리 선배로
그 유명한 4회인 것 같은데 참 곱고도 정정하다.
선명하고 화려한 모습의 대작들이지만 대부분이 낯익은 우리 고장
풍경들이라 무게 감과 친근함이 함께 했다.
건강이나 재능 열정말고도 경제적으로도 참 여유가 있나 보다 싶었다.
간단한 팸플릿 대신 사진첩을 만들어 유료 판매를 하기에 아쉽지만,
그냥 나와 옆에 꽃을 주제로 한 한국 화가의 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 나이 지긋한 전직교사 출신의 단아하고 정교하면서 친숙한
갖가지 꽃 그림에 눈이 환해지는 듯, 부신 듯 마음마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방명록에 사인해달라는 말에 미소만 지으며 그냥 나왔다.
무엇을 안다고 무엇이라고 쓸 것인가.
다시 그 옆의 추상화 전에도 들렸으나 내겐 너무 먼 작품들이라
느낌도 궁금함도 없었지만 바로 나오기가 뭣해 삼면을 다 돌고 나왔다.
작가 자신도 전시에 의미가 있을 뿐 내왕 객에는 별 관심도 없는 듯
옆 사람과 대화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구한 책과 팸플릿 무게만큼의 뿌듯함에 느린 걸음으로 눈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걷다 보니 긴 봄날의 해도 뉘엿뉘엿해 지고 있었다.
씻어놓은 쑥은 된장을 넣고 주물러 국으로 안치고,
돌나물은 채 쳐놓은 무와 부추를 넣어 고추장으로 무침을 했다.
엊그제 지인의 기린봉 야생화 사진 촬영하는데 따라갔다가 지루해서
옆에 돋은 것들을 한 잎 한 잎 뜯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술 생각이 난다는 그녀를 내 감기를 핑계로 미루었는데
오늘밤은, 이제는 영감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이상하지도 않은
사람과 한잔해볼까?
쑥국과 돌나물 무침에 어울리는 술은 무엇일까. 칠선 낭자가 선물한
복분자가 좋을까.
몇 년 전 극히 쇠약해진 내게 오빠가 선물한 산삼주? 아니면
귀하신 나무 마이산의 청실배주? 바라만 보는 이 병 저 병의 술들,
조롱조롱 맺힌 봉긋한 앵두나무 꽃 한창이던 옛집 평상으로 옮겨볼까?
달빛이 환하면 좋으련만, 살랑 봄바람 볼만 스치면 좋으련만,
달 없는 그믐밤, 영감은 오지 않고 아파트 베란다에 부는 바람,
아직은 차다.

이용미
2002년 <수필과 비평>등단
수필집<그 사람><창밖의 여자>출간
행촌수필문학상. 진안문학상 수상
한국문협. 전북문협. 수비작가회의. 전북수필 회원
행촌수필문학회 회장. 전북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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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9932cc">그저 평범한 어느 봄날 <br /><br />물 준 일밖에 없는데. <br />빈 가지로 겨울을 난 남천과 철쭉이 잔가지에 잎을 틔우고, <br />사랑초와 앵초가 힘껏 환한 꽃을 피워내고 있다. <br />돈나무의 반짝이는 잎 가장자리에도 작디작은 새순이 도르르 말려 <br />펼칠 날을 기다리고. 키워진 화초 사다가 공들여 옮겨 심지 않아도 <br />올봄 우리 집 작은 거실은 풍성한 정원이 되어있다. <br />봄은 언제나 오는 듯 가는 듯 실없이 기웃대다가 여름에 넘기듯, <br />빼앗기듯 그 자리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듯싶어도 피는 꽃들을 보면 <br />봄은 분명히 왔다가 분명히 간다. <br />꽃이 피고 지는 분명함 같이 내가 읽는 책들도 그렇게 분명한 <br />줄거리로 입력됐으면 좋겠다. <br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어 읽는 책 상관없이, 앞줄 읽고 다음 줄에서 <br />그 내용 잊어버릴지라도 요즘은 재미없는 책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br />화분에 물 스며들 듯 읽는 책들의 이야기가 내 안에도 그렇게 <br />고스란히 스며들면 얼마나 좋을까. <br />스며들어 오래도록 머물면 좋겠다. <br />촉촉이 물 머금은 화분들 옆에서 오전 내내 책과 동무를 했다. <br />시장갈 옷차림은 아니고 곧장 귀가하기도 뭣해서 예술회관 2층으로 <br />발길을 옮겼다. <br />어느 분의 고희기념 사진전 현수막이 크게 걸린 전시장을 먼저 들렸다. <br />모 신문사 발행 비매품 책을 몇 단계를 거쳐 손에 쥐고 <br />귀가하려는 길이었다. <br />무언가에 빠지면 나이를 잊는 것일까. 동문회를 비롯해 <br />몇 개의 화분에 이 쓰인 것을 보면 우리 선배로 <br />그 유명한 4회인 것 같은데 참 곱고도 정정하다. <br />선명하고 화려한 모습의 대작들이지만 대부분이 낯익은 우리 고장 <br />풍경들이라 무게 감과 친근함이 함께 했다. <br />건강이나 재능 열정말고도 경제적으로도 참 여유가 있나 보다 싶었다. <br />간단한 팸플릿 대신 사진첩을 만들어 유료 판매를 하기에 아쉽지만, <br />그냥 나와 옆에 꽃을 주제로 한 한국 화가의 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br />역시 나이 지긋한 전직교사 출신의 단아하고 정교하면서 친숙한 <br />갖가지 꽃 그림에 눈이 환해지는 듯, 부신 듯 마음마저 <br />맑아지는 것 같았다. <br />방명록에 사인해달라는 말에 미소만 지으며 그냥 나왔다. <br />무엇을 안다고 무엇이라고 쓸 것인가. <br />다시 그 옆의 추상화 전에도 들렸으나 내겐 너무 먼 작품들이라 <br />느낌도 궁금함도 없었지만 바로 나오기가 뭣해 삼면을 다 돌고 나왔다. <br />작가 자신도 전시에 의미가 있을 뿐 내왕 객에는 별 관심도 없는 듯 <br />옆 사람과 대화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br />구한 책과 팸플릿 무게만큼의 뿌듯함에 느린 걸음으로 눈에 익은 <br />거리와 골목을 걷다 보니 긴 봄날의 해도 뉘엿뉘엿해 지고 있었다. <br />씻어놓은 쑥은 된장을 넣고 주물러 국으로 안치고, <br />돌나물은 채 쳐놓은 무와 부추를 넣어 고추장으로 무침을 했다. <br />엊그제 지인의 기린봉 야생화 사진 촬영하는데 따라갔다가 지루해서 <br />옆에 돋은 것들을 한 잎 한 잎 뜯었던 것이다. <br />돌아오는 길 술 생각이 난다는 그녀를 내 감기를 핑계로 미루었는데 <br />오늘밤은, 이제는 영감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이상하지도 않은 <br />사람과 한잔해볼까? <br />쑥국과 돌나물 무침에 어울리는 술은 무엇일까. 칠선 낭자가 선물한 <br />복분자가 좋을까. <br />몇 년 전 극히 쇠약해진 내게 오빠가 선물한 산삼주? 아니면 <br />귀하신 나무 마이산의 청실배주? 바라만 보는 이 병 저 병의 술들, <br />조롱조롱 맺힌 봉긋한 앵두나무 꽃 한창이던 옛집 평상으로 옮겨볼까? <br />달빛이 환하면 좋으련만, 살랑 봄바람 볼만 스치면 좋으련만, <br />달 없는 그믐밤, 영감은 오지 않고 아파트 베란다에 부는 바람, <br />아직은 차다.<br /><br />이용미<br />2002년 &lt;수필과 비평&gt;등단<br />수필집&lt;그 사람&gt;&lt;창밖의 여자&gt;출간<br />행촌수필문학상. 진안문학상 수상<br />한국문협. 전북문협. 수비작가회의. 전북수필 회원<br />행촌수필문학회 회장. 전북문화관광해설사</font><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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