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시모로 연주할 때가/박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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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60302)
피아니시모로 연주할 때가/박기준
어제보다 차갑고 내일보다 덜 추운 부연 새벽이 내 그림자를 붙들고 바닥에 젖은 낙엽처럼 붙어 있는 너를 움켜쥔다 햇살이 말을 건넨다 놓지 않으려는 너를 안타까워하며 빛의 조각을 둥그렇게 내민다 당신을 다시 읽어야 할 계절이 기척 없이 다가와 내 품을 속절없이 파고들어도 밀어낼 힘이 없는 서로, 우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겨울을 켜는 오래된 바이올린과 몇 번 이별해 보았다 헤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못내 밀어내야 하는 양지바른 곳의 응달처럼 점점 왜소해지는 나만 남았다 강물 속을 흐르는 강물의 속사정이 돌 틈 사이 맴도는 정지된 자각이 따라 멈추는 강어귀에 돋음 발로 서 본다 정치망 그물 같은 네트워크를 닫고 새살이 돋을 때까지 줄이고, 줄이고 간헐적 단식도 했지만 변주될 봄을 맞이하기 위한 회색 몸부림만 겨울을 외곽부터 무너뜨리곤 했다 돌아서, 고해성사할 것이 남아 있는지 가늠해 보고 못 믿을 손금 안에 펼쳐지는 작은 빛무리 움 틔우는 버드나무 가지를 여리게 당겨 보는 것, 이제 우리는 서로 변주할 때가 되었다 나의 나는 다시 페이지 터너*로 되돌아갈 준비에 분주하다. 음계가 뭉그러져 보이는 내가 늙었다
*페이지 터너 : 피아노 연주자의 악보를 넘겨 주는 사람
(시감상)
봄이다. 시인의 말처럼 겨울을 켜는 바이올린은 이제 넣어두어야 한다. 소리 없이 소리를 내는 강으로 나가야 한다. 물오른 버드나무를 가만히 당겨 본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햇살 가닥 한 줌을 꼭 쥐고 말의 해를 달릴 준비를 채비해야 한다. 봄의 연둣빛 교향악을 들으며 다음 악보를 넘겨줄 준비를 한다. 삶은 그렇게 버릴 것은 버리고, 수긍할 것은 하고, 맞이할 것은 맞이해야 한다. 비록 나의 음계는 형체 없이 뭉그러져 있지만 당신의 발랄하고 경쾌한 연주를 위해 새로운 악장을 준비하고 C장조의 협연을 마련해야 한다. 변주할 때가 되었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2026.03.02 김포신문 기고
(박기준프로필)
2023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2024년 오륙도신문 신춘문예, 2024년 시사불교 신춘문예(디카시) 당선. 시집 『초록을 읽다』(공저), 수필집 『동그라미의 말』(공저). 제1회 한국디지털 문학상(수필), 제44회 근로자문학제 수상(수필), 『선수필』 신인문학상, 직지 콘텐츠 최우수상, 호미곶 흑구문학상 대상 등 수상.

박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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