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푸른 점*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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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푸른 점*
=박상수
큰 건물 일층 의자에 앉아 있다 팔각 귀기둥 앞에서 제이와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방학이라서 학교에는 아무도 없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아이스크림은 곧 녹아버릴 것 같고, 괜히 불러냈지? 제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는다 어디서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이 큰 건물에서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있나봐, 나의 말에 그게 이상한가? 제이는 사방을 둘러보며 웃는다 현관문 바깥으로 나무들은 짙어져가고, 운동장을 지나 교문 바깥까지 시리도록 파란 하늘, 세상은 온통 선명하게 제자리에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상징으로 보려는 생각을 지우려 한다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나도 모르게 속엣말이 흘러나오고, 제이는 입을 조금 오므렸다가 묻는다 방금 전에 네 말이야? 움찔 놀라자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다 네가 되는 거야, 제이는 슬프게 말한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나는 제이를 바라보며 제이를 실망시켰을까봐 걱정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더워질 거라고 말하는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텅빈 건물 로비에 들려온다 이어지는 노래는 실망하고 무너지고 다시 반복하고, 실망하고 무너지고 다시 반복하는........방학이 끝나더라도 우리 계속 만나자, 내가 말하고 제이는 말없이 웃기만 한다 제이와 나는 운동 가방을 메고 햇살이 쏟아지는 언덕을 올라간 적이 있다 병에 든 매실주스를 나눠 먹으며 찬 손으로 서로의 볼을 식혀주었지 그때의 추위가 사라지지 않는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 제이가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칼 세이건의 책 제목
얼띤 드립 한 잔
우리는 늘 학교에 간다. 무슨 학교에 가느냐는 각자 다르겠다. 그곳은 큰 건물이었다는 것과 어느 단계인지는 모르나 일 층에 머무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스크림은 이상향이다. 그 아이스크림이 어떤 색깔인지 어떤 맛인지는 모른다. 다만 먹을 수 있는 어떤 물질과 같고 달콤하겠다는 일차적인 의미만 담는다. 이 아이스크림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한계성도 지녔다. 시간이 지나면 녹을 것이고 다름 아닌 학교에서 먹고 있으니까! 제이라는 인물은 나의 또 다른 면을 갖는다. 제이第二처럼, 물론 제삼이라는 인물까지 설정할 필요는 없겠다. 시는 서정이니까. 라디오는 기계음이다. 어쩌면 정석과도 같은 어떤 규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가령 파란 불이니까 건너세요, 하듯이 하지만 우리는 파란불이란 것도 인식하지만 다소 모험을 즐기듯이 그러다가 된통 부딪고 깨지면 라디오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듯이 말이다. 자연은 늘 그대로다. 나무는 새파랗고 하늘 또한 청명하고 맑다. 이런 세상을 두고 나만 혼자 모든 것을 상징이라며 둘러친다. 그러니까 매사 형태도 없고 방향도 없는 마치 아메바와 같은 그때그때 따라서 움직여야 할 처세에 굳이 잣대를 들이미는 격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사 속는다. 어쩌면 삶은 속는 것에서 잘 대처하는 법, 여기에 살아남는 일이다. 그래 오늘도 나는 속았어, 그러나 내일은 괜찮겠지, 하지만 이건 오산이다. 매일 블랙홀이다. 죽고 다시 일어나고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건널목에서 나는 또 죽을 것이다. 과연 내일은 오늘보다 좀 나을까? 나에게 다시 물어본다. 라디오와 같은 기계음에 잠시 귀 기울이다가 아무도 없는 학교와 같은 공간에서 점점 쪼그라드는 아이스크림만 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깥은 꽃이 피고 우거진 세상이지만 안은 조금도 선명하지 않은 오직 상징만 있다.
문학동네시인선 248 박상수 시집 메신저 백 012-0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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