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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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고 영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 건 나 자신일 뿐, 꽂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있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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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설)
화자는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기를,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바라며 꽃을 심습니다. 그러나 꽃은 전혀 서두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랑, 어떤 사람, 혹은 인생의 의미 있는 관계나 진실이 하루 만에 결실 보길 바라는 마음처럼 읽힙니다. 이와 같이 화자의 조급함과 자연의 질서가 대조되는 이 시는 슬픔의 순환을 암시하지요.
기다림과 상실을 반복하며 바라보던 꽃은 마지막 연에서 ‘한 사람을 가슴에’ 묻은 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소중한 사람을 보내지 못한 화자의 마음이 꽃의 형상으로 되살아나지 않았을까요.
저 역시 이 시와 닮은 귀한 인연이 있습니다. 스물에 부녀의 연을 맺은 아버지는 제게 친부를 여읜 부재의 자리를 메워 주셨지요. 기력이 약해진 아버지는 ‘어쩌면 네 얼굴 보는 일이 오늘이 마지막 될지 모르겠다.’라는 말씀으로 저를 울리고는 했습니다.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동안, 늦게 얻은 딸 덕분에 노년의 쓸쓸함을 견딜 수 있었다는 아버지. 그 사람이 꽃이 되어 돌아왔다는 행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어제, 그제, 오늘이라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수선화를 심던 화자처럼, 우리에게도 소중한 인연이 있겠지요. 이처럼 소중한 이와의 추억이 환한 달처럼 곁에 머물며 다정하게 자기 이름 불러줄 때,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피어있을까요. 헤어짐이란 회자정리 거자필반으로는 위로되지 않는 인연입니다.
이은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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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감상)
이 시를 읽는 내내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빡빡머리로 만난 인연이 반백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살아간다는 핑계로 상가에서 만나는 일이 다반사지만 내가 힘들 때, 내 마음속에 땜통이 생길 때마다 그들을 부르지 않았지만 조용히 내 곁에 묵묵히 있었다. 대면은 접어두더라도 한두 줄의 위로 섞인 행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될 줄이야 그땐 몰랐다.
당신,
나를 지탱해 주는 동아줄...........
(시인프로필)
1966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200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천년의시작, 2005),『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문학세계사, 2009)와 『딸국질의 사이학』(실천문학, 2015)이 있음. 2004년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받음. 제1회 질마재해오름문학상 수상. 현재 『시인동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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