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것들 =진은영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남아 있는 것들
=진은영
나에게는 끄적거린 시들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따뜻하고 축축하고 별 볼 일 없을 테지만 내게는 반쯤 녹아버린 주석주전자가 남아 있고 술을 담을 순 없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퀭한 눈이 있고 그 속에 네가 있고 회색 담벼락에 머리를 짓이긴 붉은 페인트 붓처럼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헝클어놓은 네가 있고, 젖은 바지들의 돛, 아침의 기슭엔 면도한 얼굴로 말끔하게 희망이, 오후가 되면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남아 있고 또다시 아침, 부서질 마음의 선박과 원자로들이, 잘 묶인 매듭처럼 반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이 남아 있고
얼띤感想文
살아 있으면 식물이며 잔여물이겠다. 무엇을 심는 일의 무한 반복과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소비되지 않는 물질은 잔여물殘餘物이다. 별 볼 일 없는 식물과 잔여물에 주석을 한다는 일은 하루 일거리다. 술 잘 섞지는 못하나 술이부작述而不作일 것이며 술자지능述者之能이겠다. 다만 이웃집 담벼락에 핀 장미를 보며 즐거운 것도 없지만 즐거워하는 일 어쩌다 우리 집 담에도 풀 한 포기 오르면 가무담석家無擔石은 면하겠다. 이로 저 아랫도리에 푹 적셔놓는 길 도처춘풍到處春風이며 누가 들춰보지 않아도 거뭇거뭇 핀 수염瘦鹽은 다 죽었으니 절망은 가라 절망은 가고 또다시 내일이면 이웃집 담에 핀 장미에 피식避式 함 웃어보고 그 웃음 잘 묶어 피갈회옥被褐懷玉 하리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