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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계절/박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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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64회 작성일 21-04-18 10:17

본문

가여운 계절 






박소란







가볍다를 가엽다로 읽는다


허공에서 길 잃은 구름처럼 새처럼 가여운 것이 있을까, 하고


창을 열면

늦여름의 주름진 햇살이 고꾸라지듯 밀려든다 참 가엽게도


플라타너스의 바랜 옷자락을 붙들고 선 저 잎새는

어제보다 오늘 더 가엽고

초록의 실연을 훔쳐보던 사람들의 눈빛도 덩달아 가엽다


가여운 저녁의 발걸음으로

슈퍼에 가 수박을 한덩이 산다

이 크고 단단한 것을 껴안고 콘크리트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란


조금도 가엽지 않은 것,

가엽다를 가볍다로 읽어야 한다


위층에서 걸어내려오는 너의 인사는 깃털 같다

내게서 황급히 멀어지는 네가

나는 가볍다



-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에서, 2019 -











* 경쾌한 시다.

  가벼운 듯 가볍지 않은,

  어쩌면 언어의 유희 같지만 읽는 즐거움을 가볍지 않게 던져준다.

  시라는 게 읽는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주제의 무거움은 어디에 쓸까.

  주제가 무거울수록 가볍게 쓰는 법을 시인에게서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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