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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태우다/최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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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39회 작성일 20-12-1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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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태우다





최영숙






불꽃이 글자를 먹는다

허기진 배를 채우듯 한없이 먹어치우는

20년 넘게 끌고 다닌 일기와 편지

그러고도 허전한 듯 폭삭 재만 남은

불꽃의 식욕 앞에서 나는 눈이 맵다

바람이 불고 재티가 날린다


한줌 재밖에 되지 않는 저것이었다

방황과 그리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그때 그 글들

제 살 파먹듯 써내려가던 시절

빨갛게 새운 밤에 비해 타는 건 순간이어서

홀가분한가,

재가 된 젊음아, 지나간 눈물아


아직도 집 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파지와 일기를 20년이나 10년, 그 언제

다시 태울 날이 오려는지

그날도 바람이 불고 눈이 매울 것인가

마지막 연기가 흩어져 하늘로 오른다

영혼도 저와 같을 것이다


손을 대보니 재에 따스한 기운이 남아 있다

앞산은 겨울인 듯 보이지만 봄이 온 것을 나무들은 안다



- 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에서, 2006 -





* 이 시집은 시인의 유고시집이다.

  시인은 2003년 심장병과 합병증으로 인해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시도 병마와 싸우던 그 언저리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우리는 한줌 재밖에 되지 않는 것들을 쓰며 말하며 살아간다.

  한줌  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참 슬프고 허무한 일이다.

  그러나 진심은 남는다.

  봄이 오고, 나무들은 봄의 진심을 알아차리곤 꽃을 피운다.

  다 타더라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

  그 남을 것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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