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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덩어리 시계 /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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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41회 작성일 18-07-1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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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덩어리 시계

김혜순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 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한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걸까

태양 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다 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네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오후 세시의
뚝딱거리는 말,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계 바늘을 멈추어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네 가슴속에 귀를 대보면
핏덩어리 시계 저 혼자 쿵쿵 뛰어가는 소리
시간 맞춰 잘도 울린다



김혜순
1979년 계간『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옴.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기계』『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잔의 붉은 거울 』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문학상을 수상.



【감상】

    1. 그렇다. 
  박동은 초침처럼 예민하다. 피 돌리는 시계는 그렇게 울컥울컥 시간을 짜낸다. 심장이 이토록 기계적일 수 있나, 핏줄이 전선이라니, 등 하나 켜려고 온몸으로 번진다니, 첨탑과 담쟁이의 조응이 처량하다.

    2. 늘 아침이다. 
  그런 아침에 한밤을 뉘어준 이가 없다. 부재를 가르고도 시계는 돈다. 회전반경은 참혹하다. 백 년을 돌더라도 사랑 한 송이 그리는 원이 없다니, 심장은 왜 피를 짜낸 것인가. 부재는 허탈이고 쓸쓸한 연민의 촉수이다.

    3. 그러니까 태양도 시계다. 
  그 빛으로 기절했으므로 화자는 화상이 심한 연약한 존재다. 시간 앞에서 참 무력하다. 시간 속으로 몸을 던지거나 몸부림하거나 죽으려 했던 적도 있다. 태양의 시계는 얼마나 태엽이 풀려야 할까. 충격과 사랑이 그 빛들을 죄다 소거할까. 그런 동안 시계가 낳은 가족은 식탁에서 태엽을 감아 다시 시간을 푼다. 셋이나 두었으나 그 시계 또한 타자의 방향으로 돈다. 스트로게(stroge)는 서로에 대한 귀를 잃었다. 또한 일진광풍은 사랑 없는 존재와의 불화이며 담쟁이 줄기를 따라 흐르는 눈물이다. 이 또한 에로스(eros)도 필리아(philia)도 없다. 남편은 낯선 시계를 차고 도는 낯선 시간의 차가운 바깥이다.

    하여,
  사랑이 부재한 시계는 핏덩어리 기계일 뿐이다. 박동을 멈추지 않으나 서글픈 핏물의 유역이 도는 불수의근이다. 심장은 그저 시간을 쿨렁거리는 기계적인 작동일 것이나, 그것을 인지하는 뇌는 주름 안에 그 시간을 다 담을 수 없다. 머릿속에 주름살이 퍼지는 것은, 수많은 시간이 다림질해서 일 것이다. 시간의 핏방울 소리를 옮기는 건 심장이지만 시간의 부재를 깨닫는 건, 시간의 기계음을 해석하는 건, 이성이다. 그 이성은 심장보다 더 높은 첨탑에서 수많은 신호를 수집한다. 물질적 흐름으로 시각을 인지하는 것도, 핏물의 농도로 시간을 알아채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부재, 부재의 텅 빈 소리 때문에 우리는 몹시 신경 쇠약을 앓는 기계적인 심장을, 자꾸만 비탈을 오르는 시간을 가졌을 뿐이다.

  비유와 상징이 이토록 시를 풍부하게 한다.

               
                       °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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