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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이후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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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49회 작성일 16-10-31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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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이후 / 고은

빈 밭을 가로질러
빈 논으로 내려섰다
거기서부터 먼 곳이 부쩍 가까워졌다
몇다발 짚 더미에
떠나야 할 새가 하나 둘 남아 있다
빈 논으로 빈 마음으로
쉬는 것처럼 거룩한 것이 없다
벼 그루터기 새순이 돋아
송곳 같이 파릇파릇하다
하지만 다가오는 겨울을 굳이 견딜 수 없으리라
그렇더라도
한동안이아니라
온 생애로써 파릇파릇하다
아내와 나는
어느덧 돌아가는 길인데
아무 의논 없이
조금 가까운 길로 접어들었다
그때에야
아내의 말이 있었다
오늘이 꼭 내일 같아요

# 감상
  지나온 인생에 대한 조용한 관조가 뭉클하도록 처연합니다
  현란한 수사나 비유 없이도 추수후의 어느 하루의 풍경이 밀레의 그림 "저녁종"처럼
  외로우면서도 아름답습니다
  허무한 인생 노후의 풍경이 짙게 풍기면서 살 만큼 살아 왔다는 안도된 심상과 "오늘
  이 꼭 내일 같아요" 희망섞인 심상이 함께 표상되는 기막힌 절창입니다

  또록 또록 구술개울 돌다리 건너서
  구절초꽃 은하수처럼 피어나는 강변길
  도토리 주으며 할머니 따라 오르던 길

  맑은 물 새소리도 그때 그 소리
  소나무에 부는 바람소리도 그때 그 소리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에
  온 산 가득 하얗게 떠오르는 삼라먄상
  인연 따라 맺어진 인연
  공으로 시작해서 공으로 끝나버릴 인연
  그래도 보석보다 고귀한 평생 동반자

  출렁이는 아내의 둥그런 눈동자 등불 삼아서
  길고 긴 지난 세월 힘겹던 순간들 견디어 왔다

  눈 덮인 오솔길 냇가에 앉아
  돌탑을 쌓는다 아내와 함께
  고생 많이 했다고
  힘들었다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고마워하면서

  쏴- 쏴- 바람이 분다
  눈보라 일으키며 계곡따라서
  능선을 가로질러 산 너머 간다
  부처님의 해조음 들리는 듯
  아라한의 목탁소리 울리는 듯

            - 졸작 <정방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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