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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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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92회 작성일 24-09-23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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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박은정

 

 

    나는 백치에요 과자 부스러기 같은 표정으로 이곳에 살아요 가끔 화가 날 땐 돼지우리에 들어가 잠을 자거나 죽은 사람의 유언을 따라해요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동쪽을 잃은 서쪽의 걸음걸이로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는 건 무심코 끄적인 낙서의 진심 같은 것 오후 시간이 무료할 때는 손가락을 빨면서 방울토마토 맛이 나는 이유를 생각해요 죄책감도 없이 태어난 몸뚱이를 잊어요 백치가 왜 한 치의 슬픔에도 전생을 떠올리는지 아시는지요 그건 뱀처럼 똬리를 튼 꿈들이 손안에서 반짝이기 때문이에요 냉장고를 열면 썩어 가는 야채들이 있고 서랍장에는 내가 아껴 입던 티셔츠가 있어요 당신은 책상 앞에 앉아 따분한 정치 기사를 보고 있어요 어깨 위에는 두 가닥 세 가닥 당신은 요즘 무슨 생각에 몰두하는지 머리칼이 자주 빠져요 나는 울적할 때마다 당신이 흘린 머리칼을 엮어 우리를 만들어요 그곳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가 있어 세상의 종말이 와도 우리의 염소와 돼지들이 안전하게 사랑할 수 있지요 태풍이 불고 폭설이 내리는 동안 이 집은 전력을 다해 낡을 테지만 당신이 접은 페이지들 사이로 염소들이 길을 만들어요 은밀한 돼지들이 진을 쳐요 투명한 나침반으로 해 길이를 가늠하는 이곳에는 매년 여름 축제가 있지요 축제의 전야에는 모두들 문을 닫고 사랑을 나눠요 나는 축제의 폭죽 소릴 들으며 오늘도 방울토마토 맛이 나는 발간 몸을 먹어요 당신이 천장을 보며 웃어요 이불을 덮어쓰고 울어요 영영 기억하지 못해요 여름 축제는 곧 끝이 날 테고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사라질 테지만 괜찮아요 내게는 아직 혀가 있고 사랑에 빠진 백치는 한 가지 맛만을 원하니까요

 

 

   민음의 시 268 박은정 시집 밤과 꿈의 뉘앙스 60-61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백치에서 백치白齒 즉 호치晧齒처럼 희고 깨끗한 이가 떠오르기도 하고 백치 아다다가 지나가기도 한다. 여기서 백치는 아무래도 무표정한 사랑을 그린 건 아닌가 하며 감상한다. 무엇을 기대해 보지만 사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러므로 나는 백치다. 마치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라보는 듯해서 존재의 상실감마저 느끼며 차라리 유언을 쓰고 싶은 심정까지 든다. 동쪽은 있으나 동쪽은 없고 서쪽만 있는 하루였다. 여기서 동쪽은 신선한 희망과 장래를 상징한다. 그러면 서쪽은 노을만 있고 죽음뿐이다. 그러니까 무심코 끄적인 낙서가 오히려 희망처럼 닿아 나의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방울토마토 맛을 본 지가 꽤 됐다. 그래, 죄책감 같은 건 없는 거니? 하며 묻고 싶지만 한 치의 슬픔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똬리 튼 생각과 문 닫은 바다에 자꾸 몸 누이는 일뿐이다. 언제 사다 놓은 건지 냉장고 안에는 썩어가는 야채, 서랍장에는 그간 아껴 둔 티셔츠가 있고 오로지 바깥은 사치일 뿐 정치만 보고 있다. 정말이지 무엇이 옳은 건지 알 수 없는 상대다. 무슨 생각하는지 자꾸 빠지는 머리칼이 보이고 그 머리칼 보며 다시 엮어 나가는 시만 생산할 뿐 여기는 비로소 죽음을 이룬 것이 되니 이를 떠올려본다면 사실 꽤 됐다. 이 죽음을 바라보며 사는 무리만 도리어 살찌우는 일, 한 울타리를 형성할 것이다. 이것으로 집이 살고 찾아온 이가 있다면 나침반은 따로 없을 것이며 축제 아닌 축제로 다시 삶을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는 폭죽도 없고 사랑도 없는 무혈입성할 수 있는 진지, 진주성 돌 하나 쌓고 들여쌓고 그러나 진정한 돌은 깨닫지 못한 건지 아예 깨졌는 건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내 울기만 했다. 그러는 너는 천장을 보며 웃고 있겠지, 이제 축제는 끝날 테고 사람은 하나둘 사라지겠지만 입속은 다 타다 만 검은 혀만 찰 것이다. 아직도 내게 못다 한 사랑에 기대를 해보건만, 다시 돼 살아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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