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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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황동규
입춘 가까워 추위 잠깐 풀린 어제저녁
시의 혈관 건강 살피는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
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그만 내 뇌혈관 상태 들키고 말았다.
운 떼려다 멈칫하게 만든 낱말,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두세 번씩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모일 때
내가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
즉시 요양원 보내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그 말,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 디멘셔(dementia) 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이 교수가 치맵니다, 했지.
한평생 영어로 먹고산 셈이지만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별일은 참 별일이다.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
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쓰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센강에 몸 던진
시인 파울 첼란,
그가 독일어로 마신
‘검은 우유’*가 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다.
* 파울 첼란, 「죽음의 둔주곡」에서
(시감상)
선친으로부터 평생 술에 덴 어머니가 나에게 하시는 말. 이 놈아, 평생 술 입에 대지도 말거라.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한 내가 평생 술 퍼마시며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내를 괴롭혔다. 선친과 어머니 두 분 다 뇌경색에 혈관성 치매로 돌아가셨고 수년 전 친형도 급성 뇌경색으로 뇌졸중집중치료실에서 퇴원을 했다. 워낙 초기에 발견해 지금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지만 우리 집 가족력은 혈관성질환에 위험성이 노출되어 있다. 백세 시대를 비추어 보면 나 또한 아직은 젊은 축에 속하지만 날이 갈수록 직전의 생각들이 뇌리 속에서 침몰하듯 매몰되어 버린다. 매일 드나드는 환자들을 바라보면서도 질병의 위험성을 망각한 채 죽음의 강을 향해 아가미를 헐떡거리며 허연 배를 뒤집고 헤엄치는 나, 시인의 푸가처럼...............
(시인프로필)
황동규 시인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박사.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어떤 개인 날』『풍장』『오늘 하루만이라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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