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 / 박경희
페이지 정보
작성자본문
오소 / 박경희
나가 구십 하고도 거시기 두살인가 세살인가 헌디도 까막눈 아녀, 젓가락을 요로코롬 놔도 뭔 자인지 모른당께. 그냥 작대기여 헌디, 할멈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수술받는다고 병달이 놈 손 잡고 올라갔잖여, 병달이가 무신 일 있으믄 편지 쓰라고 봉투에다가 주소는 적어두고 갔는디, 나가 글씨가 뭔지 오치게 알어, 기냥 알았어,라고만 했지. 그때는 산 넘어가야 전화가 있을랑 말랑 혔어 암만,
어찌어찌 보름이 지났는디 이 할멈이 오지를 않는겨, 저짝에서 소쩍새가 소쩌럭 소쩌 여러날 우는디 환장허겄데, 혼자 사는 노인네들은 어찌 사나 몰러, 그나저나 수술받다 죽었으믄 연락이라도 올 텐디 꿩 궈 먹은 소식이더라고,
병달이가 써준 봉투 생각이 나서 종이 꺼내놓고 뭐라 쓰야겄는디, 뭐라 쓰야 헐지 몰라서 고민허다가 에라 모르겄다, 허고는 소 다섯마리 그려 보냈당께, 근디 할멈이 용케 알아보고 열흘 만에 왔더만, 나가 글씨보단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걸 그때 알았당께
-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감상]
구십 두 살 혹은 세 살 정도 잡수신 할아버지의 말을 받아쓴, 구수한 사투리가 정감 넘치는 시다. 내용인즉, 할머니가 병달이(아마 아들쯤 되어 보인다) 손을 잡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 수술받으러 가는데 무슨 일 있으면 편지 쓰라고 주소를 적은 봉투를 남겨 놓았다 한다. 산 하나 넘어야 전화가 있을랑 말랑 하였다니, 요즘 흔한 휴대폰은 고사하고 집 전화 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아주 오래전 일로 추정된다. 암튼 문제는 보름이 지나도, 소쩍새가 여러 날 울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할머니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할아버지. 행간 사이로 툇마루에 앉아 온종일 멍하니 서울 쪽 하늘만 바라봤을 풍경이 스친다. 그러다 문득 편지 봉투가 생각났을 할아버지. 까막눈인 당신이 골몰하다 할머니에게 그려 보낸 그림이 소 다섯 마리란다. 여기서 다시 시의 제목을 읽어보니 ‘오소’다. 다섯 마리 소. 이 그림 보거들랑 오소. 많이 걱정되고 많이 보고 싶으니 빨리 집에 오소. 그리고 할머니가 그 뜻을 용케 알아보고 열흘 만에 집에 왔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시의 표면적 내용이다. 중국 촉한의 재상인 제갈량 빰 치는 놀랍고 탁월한 기지다. 시가 가진 진정성을 의심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티키타카가 유쾌하다. 그러나 나는 시를 읽고 현실의 세계에서 생각한다. 만약 할아버지에게 그런 놀라운 기지가 없어 그냥 소 한 마리만 그려 보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할아버지 당신 얼굴을 그려 보내거나, 혹은 외로운 집과 마당의 풍경을 그려 보냈으면? 솔직히 나는 그것이 어떤 그림이던 할머니가 집으로 왔을 거라고 믿는다. 아직 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도 고집스럽게 뿌리치고 허둥지둥 짐을 싼 뒤 서둘러 병원을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도 소 울음처럼 선하고 순박해서 아름다웠던 그때 그 시절, 우리 할머니들에게 소는, 집은, 할아버지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이명윤)
댓글목록
崇烏님의 댓글
그 그림 몹시 궁금해지네예, 오소^^! 부럽기도 하고 그림 잘 그리는 분요.....작소 잠깐 뇌 충전하다 갑니다. 건강하시구요 형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