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은 엷어지는 분홍 =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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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은 엷어지는 분홍
=이제니
영원의 세계는 고독으로 물들어 있었다. 영원은 자신이 하늘의 목소리를 받아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종이와 물감을 다루듯 사랑과 고독의 낱말을 써 내려가던 날들 속에서. 세계는 영원의 회전 속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원. 타원. 나선. 삼각형. 영원의 문장은 기하학의 세계와 맞닿아 있었다. 더는 무엇도 분별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영원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은 중첩되어 순환하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였던 미래를 품은 기록이다. 과거를 향해 나아가는 미래의 곡선이다. 영원은 어두운 곡선을 그렸다. 어두운 수첩에 영원의 숫자와 영원의 도형과 영원의 낱말을 봉인해 두려고. 가장 닮은 영혼에게 언젠가 언제고 전해지리라는 믿음으로. 영원은 점점 분홍으로 엷어진다. 소멸이 아니라 무한을 향해서. 위로 위로 올라가려고. 위로 위로 낮아져서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웹진 《같이 가는 기분》(2025, 겨울호)
얼띤 드립 한 잔
촛불의 아이는 공허로 불타고 있었다. 촛불은 누구의 도움 하나 없어도 저 비장함으로 가득한 한 어린 얼굴을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람과 비를 다루듯 우울과 무력감의 부식을 삭혀나가는 날들 속에서, 아이는 촛불의 심지 속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벽. 천장. 바닥. 기둥들. 촛불의 언어는 건축학의 체계와 규율을 감싸고 있었다. 가일층 심혈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촛불의 아이에서 바람과 비는 공존하며 내적모순을 탈피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다 타버렸던 앞날을 가리키는 횃불이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양치식물의 얼굴이었다. 촛불은 뾰족한 실백 끝에 저 홀로 불타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의 기도와 촛불의 바람과 촛불의 상징을 창연히 비추려고, 가장 뜨거운 촛불에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풍경에 이를 때 없이 밝은 신념을 심으려고, 촛불은 점점 자줏빛으로 타오르기만 한다. 화려한 것이 아니라 실속을 향해서, 넓게 트인 길을 향해 나아가려고, 가까이 좀 더 가까이 타올라 의지를 잃은 이 없이 의지가 되려고
영원이 고정불변이라면 세계는 다변화며 고독인 데다가 소멸이기도 하다. 소멸을 타파하여 무한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반드시 영원은 있어야 하듯 사랑과 믿음으로 다가서려는 저 여린 분홍을 본다. 위 시를 감상한다며 시인의 명시에 흠이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 한 켠에 좀 어두웠으나 분홍에 그만 자줏빛인양 마음의 어둠을 촛불로 승화시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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