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의 연속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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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의 연속
=김이듬
내 방은 함석지붕 아래 있다 비가 오면 두 사람이 내 방으로 온다 초콜릿 케이크 같은 진흙을 바짓단에 묻히고 빗소리 들으러 온다
나무딸기 덤불숲이 보이는 내 방은 빗소리를 녹음하는 작은 음악실 같다
오래전 연주 같아 이젠 아무도 안 듣는 클래식 같아 K가 말한다 대화가 아니라 독백처럼
무미건조하지는 않지만 무의미한 소리 누구든지 자신에게 말할 때가 있다
빗소리가 침묵과 섞일 때 P가 입을 연다
전쟁 중에 동료로부터 받은 생일 선물은 폭발물이었고 그 병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대 어제 기사를 봤어
아직도 함석지붕이 있고 녹슬지 않은 난로연통과 포금이 있고 아직까지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창문을 여니 비현실적으로 축사 냄새가 난다
빗소리를 재현하면 음악이 되겠지만 공기 중에 뒤섞인 어둠을 복제하면 그림이 되겠지만
누가 자연과 경쟁하겠는가
P는 화가 K는 작곡가 나는 시인 서로의 실패함을 시인하지 않을 만큼 친밀하다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에게 말하며 충돌하지 않는다
표현하고 싶어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창 너머 보며 P가 중얼거릴 때
하염없이 쪼그라들며 조는 나
텁텁한 K의 목소리 수다스런 장식은 싫지만 불필요한 수사를 모두 없애고 핵심만 응축하면 뭐가 남겠어?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지만 누군가의 말을 중복하거나 재현하는 것 같아서 자고 싶고 그만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문장 웹진》 2023년 12월
김이듬 2001년 계간 《포에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등
흰 가운을 걸치고=鵲巢感想文
내 방은 의자가 많은 약 사십 평에 이른 아주 너른 쪽방이다. 이곳은 늘 혼자만 있다. 창밖은 그렇듯이 비만 내리고 드립을 위한 로스팅과 커피포트는 항시 돌아간다. 양팔은 검은 토시를 끼고 검은 장갑에 예복 차림의 소복을 둘러 영전하니 애절한 바이올린 소리는 맵고 찬 바람만 쐰다. 늘 좌면우고左眄右顧다. 그러니까 음악은 없지만, 음악처럼 덤불숲을 이루며 음악 같은 클래식으로 우둔한 자만 있다.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하기까지 한 황량한 시간에 온정주의나 공동체 의식 같은 회유지만 또 그런 회유는 아닌 듯하고 그런 침묵 밭을 거닌다. 역시 누가 먼저 입을 열까? 피다. 우크라이나처럼 전쟁이 일어났데 뭐 개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밀가루는 뿌려지고 도넛처럼 안개는 산허리를 감싸고돈다. 우발적인 폭발은 도시 전체에 상처를 입히고도 남을 의식 그러나 안개는 여전히 강을 덮은 채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다. 구름은 밀려와 저녁을 밀고 밀었던 그 바닥엔 몇 안 되는 알 알 알 새들이 날아와 부리로 쪼며 있다. 누가 피아노를 틀 것인가? 지긋지긋한 바이올린 독주회 그러나 그 백미는 역시 스미스의 경제 질서에 도덕을 가미했다는 것 여전히 방은 죽지 못해 아픈 소리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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