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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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
연필은 제 몸을 부리나케 쓴다
내버려 두면 저절로 닳을 것 같아, 멀쩡한 볼펜심 버리고 자루만 썼다가 뺨을 맞았다
그날 이후 나는 쓸 만큼 쓰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뒤늦게 뺨을 어루만지던 손바닥은
닳을 대로 닳은 손바닥은 아직 쓸 게 남았는지 쓰지 않으면 까먹는 게 남았는지 306호 라디오를 켜고 바닥의 말씀을 몽땅 받아적는다
라디오는 귀로 읽고 마음에 새기는 거, 환청도 마찬가지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럴 리 없다
다 아는 복지사는 미래요양원 어디에도 라디오가 없고
여기 얼마나 좋은 줄 몰라, 몰라서 다행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독실한 손바닥은 구석구석에 복음의 라디오가 있다, 언제든지
정신을 놓친 손바닥에게 쥐여줄 수 있는 것이 제정신이 아니므로 나는 죄없이 늙은 손바닥을 꼭 쥐고 아멘
아멘, 맞장구치며 미래를 둘러본다
어찌나 깜깜하게 써댔는지 얼마 남지 않은 몽당 하나씩 들고
간신히, 그러나 전속력으로
미래를 향해 줄을 긋는 손바닥이 수두룩하다
댓글목록
36쩜5do시님의 댓글
깜깜하게 쓰는 것! 몽당연필이 될 연필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글쓰는 이들의 숙명이기도 하네요.
무의(無疑)님의 댓글의 댓글
오직 하나를 썼는데
어쩌면 두 개로 확장시켜주시니
고맙습니다.
공덕수님의 댓글
몽땅 좋군요.
무의(無疑)님의 댓글
단지 다섯 글자로
할 말 없게 만드는 건 큰 재주라고 생각합니다.
잔재주에 불과한 말놀이를 팽개치고
살아 움직이는 글을 건져 올리는 솜씨, 늘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