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물 내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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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우기 위해 시간을 잠근다.
지난밤 꿈에 걸려 넘어진 불안의 상처를 지우고
마음을 고요하게 물들이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나에게 주어진, 여백조차 허락하지 않은 관용.
파도 소리 한 소절, 소 울음소리 한 음절,
햇살과 비와 바람의 멜로디를 품은
농부의 하얀 지문이 온몸으로 번지는 동안
내 안의 봄을 천천히 가꿀 수 있었다.
마음이 열리는 시간,
내가 삼켜 둔 하루 한 끼의 철학이 비로소 제 모양을 찾는 순간
나는 저녁 숲의 목관악기로 다시 태어난다.
차분히, 또다시 마음을 갠다.
그리고 변기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너무나 맑고 감미로운 교향곡처럼 내 귓가를 적신다.
내가 그녀의 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의 회전은 어둠을 파고들며
내가 잊고 지낸 이름들을 하나씩 씻어 내려 보낸다.
휘도 높은 은빛 소용돌이가 나의 그림자를 눕히고
그 위로 보이지 않는 날개들이
가벼운 먼지처럼 흩날린다.
나는 문득, 내가 비워낸 것들이
실은 나를 오래전에 떠나온 사물들의 귀향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궤도는 천천히 팽창하며
변기 물 속 눈부신 회전과 포개지고
그 작은 하강의 길은
은하 하나가 탄생하기 직전의 숨결처럼 떨린다.
물방울 하나가 마지막으로 깨지는 순간,
나는 나를 벗어나 나 아닌 것들로 가득 찬 투명한 방에 선다.
그 방은 파도 없이 밀려오는 바다이고
소리 없이 피는 꽃이며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이 비처럼 스며드는 빛의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나는 아주 늦게, 아주 조용히 이해한다.
비움은 소멸이 아니라 귀환이며
내려보낸 모든 것이 도는 길을 따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잠시 그대로 선다.
순환의 중심에서
마침내 나를 비우고 만나는
새로운 나의 숨결을 듣는다.
댓글목록
김재숙님의 댓글
혼자만의 시간을 이토록 절절히 잘 표현하셨군요 읽는 내내 감동이었습니다
좋은시 기쁘게 잘 읽고 갑니다 시인님 건필하세요~~^^
수퍼스톰님의 댓글
시인님 다녀가셨네요.
년말이 되니 바쁘지 않으면서도 괜히 몸만 분주하네요. 시마을을 잠시 잊을 정도로...
첫눈이 제법 층을 쌓는 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시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