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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가는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반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53회 작성일 20-08-14 18:43

본문

광양 가는 길 / 반석

 

나는 한 마리의 달팽이가 되어

안개 덮인 새벽 산을 내려와

뿔을 다듬고 이슬로 몸을 씻고 길을 나선다

풀숲을 기어서, 강물을 기어서, 가시덩굴을 기어서,

아스팔트 길을 기어서 간다

기어가다 보면 하와의 뱀을 만나고

선악과를 보기도 한다

볕 좋은 날 과수원집 마당 의자에 앉아

먼지를 털어도 본다

길을 재촉하니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빗물에 쓸려 데굴데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등에 지고 가던 한 평 남짓 집 덕분에 목숨만은 살렸다

그래도 길을 간다

포도밭을 기어서, 황금들판을 기어서, 도시 빌딩 숲을 기어서,

자동차 바퀴를 피해 기어서 간다

네온사인 반짝이는 도시가 유혹하면 나는

면도날 위에 발을 얹고 미끄럼을 탄다

그래, 지금은 기는 것에 집중해야 해

걸어간다고 착각하지 마, 날개가 없다고 슬퍼하지 마

한 뼘의 길이라도 침을 정성껏 바르자

가다가 만나는 까마귀 참새 너구리 멧돼지 고라니 에게도

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지

가다가 방향을 잃으면 뿔로 교신을 하지

목적지 없는 삶은 참 불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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