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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농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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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64회 작성일 20-07-0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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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농원에서



1.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 하고 한 줄 쓰고 무언가 잊은 듯하여 창 밖을 본다. 주인공이 도착하지 않았다. 빈 뜰에 이름 모를 새가 날아와 앉았다. 흙 위를 기어가던 새빨간 개미를 쪼아먹고 있었다. 나는 하얀 종이에 손가락이 베어 피가 조금 났다. 등에 황금빛 무늬를 짊어진 뱀 한 마리가 구석으로 기어들어간다. 시가 아직 적혀지지 않은 핏방울 속에 여름하늘이 비친다. 사과 한 알을 먹고 싶다던 노천명은 바라던 대로 5월에 죽지 못하고 6월에 가서야 죽었다. 소반 위에 엎어졌던 글자들이 천으로 얼굴 둘둘 말고 사과나무 아래 누워 잠잔다. 사과나무 잎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시를 쓰고 있다. 


느슨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곳에는 사과 대신 활짝 벌어진 잎마다 조용히 예비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조락으로부터 온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흙 위에 뒹굴고 있는 한때 사과였던 것을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흔들리는 잎들이 애써 가리는 것을 헤치고 안으로 깊이 들어가 저 비췻빛이고 구름이 간혹 지나가고 있는 것을 마주할 수 있다면. 이것이 허공에 떠도는 사과향이라 한들, 떠나갔다는 너의 몸에서 두릅순 조금이랑 산딸기 조금이랑 여치 청설모 오르락내리락하는 사계절 내리 까칠한 몸통 피안으로 걸쳐논 그 길이랑, 모두 내 망막 위에 모여앉아 바다가 갈라지는 축제를 벌여보자. 


오늘은 햇살이 아직 절정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조락이라 한들,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은 네가 읽어낼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들도, 네가 읽어낼 수 없어야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니. 너와 나, 우리의 가난이야 사과껍질 속 과즙과 함께 숨쉬고 있는 그 새하얀 혈육에 기대자. 사과농원에는 지난 여름 사과향이 떠돈다. 사과향기 속에는 네가 묻혀 있다. 바위 틈 하얀 손가락 곱게 내민. 바위 틈 졸졸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차갑고 깨끗한. 내 손가락에 묻은 빠알간 사과향기에 코를 대어본다. 물방울 튀기는 내 후각이 머언 꿈 속에 뒤척인다. 


2.

달무리같이 새하얀 어느 여류시인이 사과농원에 찾아오겠다 한다. 악어가죽을 무두질하던 남자는 사과나무들 사이를 걸어 녹음 어른거리는 그속으로 멀어진다. 먼 데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 빠알간 사과알들이 그에 조응하고 있는. 그는 악어가죽으로 만든 시집을 남겨놓았다. 녹슨 철문 빛바랜 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져 사색(思索) 가운데로 떨어지는. 삐그덕거리며 출입을 여닫는 여인은 녹음에 젖어 찾아왔다. 오른손 중지손가락이 잘리고 없었다. 잠깐 서로 말이 없었다. 파문이 보이지 않는 물의 청각을 건드리며 조용히 퍼져나간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새까맣다. 사과나무 그늘이 어느 차가운 바위에 닿아 쾅쾅 부딪치며 목놓아 울고 있다. 내가 건너갈 수 없는 것에 닿아 몸부림친다면, 그때 이 사과는 어떤 속삭임을 들려줄까? 어떤 빛깔로 하늘에 오를까? 


오월에 오겠다던 여류시인이 유월이 되어서야 왔다. 대리석탑을 쌓는다. 하얀 계단이 끝닿은 데 없는 하늘로 오른다. 하늘 빛깔은 점점 더 옅어진다. 파도가 한번 쓸고가자 사과농원 그 많은 청록빛 잎들이 한꺼번에 젖었다. 한꺼번에 광휘를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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