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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아래에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361회 작성일 20-06-11 00:07

본문




만발한 벚꽃 아래에는 시체가 묻혀 있는 법이라고, 

어린 마이코가 내게 말해준다.


그녀의 표정은 아직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책장 같았다. 

촘촘히 걸어가는 

하얀 종이 위에 

연분홍 초경혈(初經血)이 번지고 있었다.   


그럴지도 몰라. 이렇게 비단 기모노가 바스락거리는 그 아래에서. 

이렇게 화려한 시취(屍臭)라면. 

 

네가 묻혀 있을 활자에 

초봄의 눈발같은 

샤미센의 시린 음향을 돌려주렴.  


그녀의 작은 손이 내 폐 안으로 들어왔다.

현을 튕기듯 

따스한 연록빛 거울이 내 폐 안에서 

빈 페이지를 소곤소곤 넘겼다.


미세하게 

꼼지락거렸다. 


새하얗게 분칠한 벚꽃들이 

모두 지면 어쩌죠?

 

만춘(晩春)의 어린 녹음 지줄임에 벚꽃 아래 묻힌 나는 어쩌죠?


땅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떠도는 샤미센 소리

빙편(氷片)인 벚꽃은 어쩌란 말이죠? 


그녀가 검은 벚나무 가지에 매달려 

흰 꽃잎과 작은 꽃술을 무한을 향해 흔드는 동안 

그녀도 나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아직 절정에도 이르지 못한

벚꽃들이 바람에 세차게 일렁였다. 


젖은 다다미방안이 환해지면서 

수많은 벚꽃잎들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댓글목록

봄빛가득한님의 댓글

profile_image 봄빛가득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녀의 시간이 유예 되어간다

미루어지는 시간,

아름다움이 그리우면 꽃을 꺾어 꽃병에 두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시간이 꽃을 찾아 바람이 일렁이는 하얀 종이 위를 스치듯 걷고 있다 가늘고 여린 몸에 꿈을 꾸듯 몽환적인 그녀의 표정이 신비롭다

본연의 모습을 지켜 여유로움을 사랑하는 마이코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수많은 벚꽃 아래에서 등불을 켜고 있다



*혼자만의 상상으로 헤매다 갑니다. 시인님^^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profile_image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괜히 사족을 달자면,

마이코는 벚꽃 아래 시체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 시집 속에 있는 활자 -> 벚꽃 아래 묻혀 있는 사람 -> 벚꽃 그 자신 으로 계속 바뀝니다. 어떤 존재로 확정되지 않고 계속 유전하는 애매한 존재입니다. 벚꽃 아래 시체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인지, 그 자신이 그 아래 묻힌 시체인지 아니면 벚꽃인지 계속 바뀌죠. 그런 식으로, 마이코의 모호함과 신비함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 애매함과 신비함에 성적인 매력을 더하였구요.

하지만 시인은 이런 모호함과 신비로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나는 시인입니다. 유전하는 마이코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나(시인)입니다. 시인 자신의 감각으로 이런 유전하는 것을 포착할 수 있고 대화를 할 수 있죠.

마지막은 마이코와 내가 다다르는 절정 - 섹스입니다. 이것은 예술적인 인식과 황홀을 상징합니다. "젖은" 다다미라고 하는 표현이 일부러 그런 목적으로 쓴 것입니다.

브루스안님의 댓글

profile_image 브루스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코렐리 000님
관계중심의 국내보다는 해외문학상이나
영문 번역시집 출간에 포커스를 추천드립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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