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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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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363회 작성일 19-10-20 09:18

본문




하얀 시트 위에

팔 다리 없이 개나리꽃 물든 자국만 요란하였다.


퇴촌으로 가는 외진 길 이차로에서 사슴 한 마리를 보았다.

게시판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유명산이라던가 명성산이라던가 아무튼 형체가 허물어지고 있는 거대한 산 곁을 지날 때였다. 


죽기 직전까지 무릎을 세워

소반 위에 원고지를 놓고

병원비를 갚으려 시를 썼다는 노천명이 오늘 죽었다. 


그녀의 오월을 따라 

작은 길 하나에도 곁을 내 주지 않는 

숲 안으로 

숲 안으로 

들어가노라면,

고가(古家) 한 채 숨어 있었다. 


깨끗한 천으로 덮은

마룻바닥 호흡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어느 오월 밤 

꽃을 따서 문 사슴이 병풍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적막한 사람들의 이야기.

불 꺼진 후박나무 가지에 

수줍은 통증이 돋았다.

 

차갑게 뻣뻣한 발바닥이 

이불 속 열기에 뜨거워질지언정, 

텅 빈 혈관 안에 그리운 것들이 산수유열매 빛깔로 함께 

썩어가는 늦봄의 소리. 


사슴은 제 가슴을 절개해 

벌어진 붉은 나무들 사이로 산의 소리를 듣고 싶었으리라.

이리저리 뒤척이던 노천명은 

오월에 죽지 못하고 며칠 더 살다가 

유월이 되어서야 죽었다. 


퇴촌 가는 길 이차로에서 만난 사슴은 

두릅순만큼만 자란 뿔 위에

이끼 돋은 소녀를 묻히고 있었다.

사슴은 먼 데 고개를 돌려

신호등을 지나가는 어떤 

영원 비슷한 것과 시선을 나누고 있었다.   


노천명이 죽기 전날 밤

그녀의 병실 안으로 

명성산 숲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때 노천명의 조금 벌어진 

입 속에 뻗어나간 

퇴촌 가는 길 이차로에는, 

달빛이 사향냄새와 섞여 세모천의 물소리가  

들렸을 지도 모른다. 


숲 안으로

그녀의 발자국을 하나 하나 따라가다 보면,

산수유 열매 사태진  

선홍빛 바람 속에 서정시처럼  

고가(古家) 한 채 숨어 있었다.


  

댓글목록

존재유존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존재유존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망자의 삶에 대한 미련과 소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사진을 보듯이 눈앞에 선명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강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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