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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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이 없고
시간과 공간이 없고
처음과 끝이 없는 곳에,
그가 있습니다.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이윽고,
그가 무언가를 찢어발기자
비로소 공간의 파동이 요동치고,
그가 숨결을 불어넣자
비로소 시간의 바다가 흐르기 시작하지만,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요동치는 파동으로 흐르는 태고의 바다에는
생(生)과 사(死)의 거센 파도가 들끓고,
크고 작은 존재들로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환희의 섬광이 그들을 비추고
비통의 폭우가 그들을 꿰뚫을 때에도,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바닷속으로부터 끝없이 그를 향하는,
찬양과 경배의 노래,
저주와 원망의 절규는
수면에 떨어지는 낙뢰의 굉음에
이내 힘을 잃습니다.
누구도 감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지만,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지친 존재들에게, 시간은 연민으로
그를 향해 빌 두 손
그를 향해 꿇을 두 다리
그를 향해 엎드릴 대지를 선사하여, 이윽고
‘단 한 번의 눈길이라도-.’
간절한 기원이 지상을 가득 채우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두 다리는 설 수 없을 만큼 뒤틀리고
끝없는 외침으로 음성 대신 핏물만을 토해낼 무렵,
차마 이를 볼 수 없던 시간은 다시,
그들에게 망각을 선사합니다.
마침내 기원의 기원마저 망각해버린 지상의 것들이지만,
그것이 존재의 이유인 것마냥 빌고 또 빌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태양이 빛을 잃고, 달은 자취를 감추어
끝없는 폭풍과 해일이 세상을 휩쓸기 시작합니다.
지상은 붕괴되어 최초의 바다로 회귀하는 것만 같습니다.
세상 마지막으로 남은 바다 한가운데 위태로운 한 뼘의 땅 위에,
한 소년이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제 어미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 손을 모아보지만, 어떠한 기대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을 때,
그가 나타납니다.
최초의 대면-
소년은 조아립니다. 세상 가장 하찮은 존재가 된 것마냥,
천둥이 더욱 내려칩니다.
소년은 생각합니다. 내 앞의 그로 말미암아 세상은 안식을 찾으리라.
폭풍이 온 세상을 휘감습니다.
소년은 흐느낍니다. 우리의 기나긴 기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리라.
땅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소년은 고대합니다. 하나이자 모든 것인 그의 품에 안기리라.
두 손을 모은 부모의 시체가 수면에 떠오릅니다.
소년은 고개를 듦과 동시에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고,
제 아비와 어미의 품 속에 안기게 됩니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소년은 보지 못하였지만,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
하늘과 땅이 스러지고
시간과 공간이 멈춰버리고
처음과 끝의 경계가 무너져가는 곳에,
그가 있습니다.
아무 표정이 없는, 그가 있습니다.
그의 표정은 아무 표정이 없는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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