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함을 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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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함을 파다
박찬일
마음이 궹한 날에는 비도 후줄근하게 온다.
쫘악쫘악 쏱아지면 속도 후련하련만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날은 찔끔찔끔 오다가
담벼락에 어린아이 찍찍 낙서하듯 휘갈겨 오기 일수라
길 가는 아가씨들 옷자락이 촐촐대다 치렁해지고
우리네 바지자락은 민망스레 후줄근해진다.
밉쌀스런 비를 보느니 커피 한 잔을 입에 물고 발길로 방문을 밀고
사유를 본다.
며칠째 나의 사유는 창밖의 허름함이다. 아니 내 안의 허름함이다.
허름함 뒤에 숨은 순수와 진실.
허름함 뒤의 나른함과 방 한 구석 벗어던진 바지같은 껍질
국수 한그릇 간신히 말아먹다 시간에 쫒겨 올라야하는 간이역에서
철길 자갈들 사이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는 바퀴 사이,
웃고있는 제비꽃 한송이를 보는 감정이 허름함 아니던가?
허름함은 여백이다.
치열함 대신 얻는 여백이나 충일이다.
전시회에 걸린 어느 화가의 그림에서 찾아내는 여백이거나
째지게 신시사이저의 불빛 나부랭이가 음악의 공간들을 휘저을 때
뒷골목 50년쯤 된 국수집에서 찾는 여백의 허름함이다.
나는 그런 허름함이 좋다.
소설가나 희곡작가들이 주섬주섬 이런저런 부재들로 집을 지을 때
아궁이 하나없이 사람 마음에 따듯한 불을 때는 허름함과
위로 받지 못한 이들에게 경운기 대신 호미하나 들고 나싱갱이 한바구니 캐어
흙 털어 씻어내고 파 한뿌리 뽑아와 장독대에서 장꽃 핀 된장 한수저 뜨고
찬 뚝배기에 숭숭 풀어 바글바글 끓여낸 된장국에 밥 한술 말아내놓는 그런 허름함이 좋다.
유일한 위안이 될 그런 허름함이 좋다.
화려한 문장으로 억지의 낯섬을 찾아나가는 카피라이터의
발칙한 낭만과 상징,초현실이라는 뭐뭐주의의 시걸음보다
어머니 젖무덤같은 허름함이 좋다.
고향찾아가는 날 반겨주는 동구의 늙은 느티나무처럼
푸근히 웃어주는.
201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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