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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모놀로그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1활연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1,439회 작성일 21-03-08 00:01

본문

종이배 모놀로그

      활연




          쪽창에 볕 든다

  기름진 세상에서 주변머리 없어 한 끼 구걸하지 못하고
  끝끝내 움켜쥔 한 주먹 자존

  뒷골목 벽골제에 잠기는 날을 누가 기억할까
  사랑했노라 고백하는 이도 그때 살갗이 그립단 이도

  푸른 뼈 핥아줄까 창자가 뒤틀려 풀 한 끼 뜯을 수 없는 가풀막 밀어 올리다 구호식량처럼 창에 어리친 몰골
  빈 웃음 닦으며 차라리 고요해지자

          여기는 망자의 거리
          죽어서 눈빛 나누는 철 늦은 거리

  때아닌 낯설고 환한 빛, 창밖으로 아이들 우짖는 소리 밖의 소란은 지금 아무도 배곯지 않았다는 뜻

  쓸쓸한 유배를 마감하며 그림자보다 더 낮게 누워 마천루 비켜서 강렬한 눈빛 맞추는 햇살

          음지는 목덜미였으므로
          오래도록 핥아주어도 모자랐으므로

  커다랗고 둥근 꿈을 발아시키다가 화수분 멈칫 공중에 떠 있는 순간
  외로웠지만 황홀했다

          밤낮 갈마든
          아사할 뱃속에 희미한 혼불 떠돌아

  냉골은 차갑지 않았다
  얕은 홑이불 위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멸의 발자국

          기껍다
          천천히 끌어당겨 덮는 포근한 내세

          내 속의 내가 나를 찌른
          내 속의 남이 나를 벼른

  창 모서리 닦는 친근한 햇살 쥐구멍에 든 가느다란 빛살조차 공평해지려 주춤서기한단 걸 믿을까 저 빛, 날카로워도 온누리 다 먹이고 재운다 시든 잎 제 몸 수그리고 말라갈 때 맑은 눈 지우지 못하고 아득히 바라보는 갈맷빛 세상

          마른 뱃가죽 움켜쥐고
          바닥보다 더 깊이 납작해지려는

          종이배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어도
          아무도 듣지 않는 소야곡일지라도

  몰락한 문장 앞에 냉수 한잔 바치렴
  대명천지 불콰한 딜레마를 위해 반전 없는 반전을 위해 몸 녹여 지핀 시나리오

           그 아득한 예감에 나를 묻어다오




댓글목록

1활연1님의 댓글

profile_image 1활연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위 시는 2011년 경 32세 이른 나이에 작고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을 기리며 쓴 것입니다.
오래전 글을 조금 손보았습니다.

내가 읽은 시방에 이따금 기성 시에 대한 감상을 적어 올리곤 하는데
'공부'의 의미입니다. 두루 읽는 것 또한 시를 쓰는 힘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가볍게 나누는 말도 다정할 때가 많습니다.
수담은 요즘의 시국에 적절한 간격이라 여깁니다. 서로 격려하고
읽어주고 시를 즐겁게 감상하고 논하는 곳이기를 바랍니다.

희양님의 댓글

profile_image 희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를 읽는 내내 예리한 칼끝을 꺼꾸로 잡고 아파하는 시적화자를 읽고
애틋함이 가득했는데
최고은 작가님을 생각하며 쓰신 것이군요

활연님의 시는 몇번을 읽고 탐독을 해도
내게는 조례에 옻칠하는 격이네요 ㅎㅎ
좋은시 감동으로 읽습니다.

최현덕님의 댓글

profile_image 최현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사유의 파도가 태평양입니다.
'수담은 적절한 간격'이라는 말씀 동의 합니다.
자주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시, 잘 감상했습니다.
'고름이 살 되나?' 경종을 울립니다.

김태운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아무도 듣지 않는 소야곡일지라도///

활연님이 띄운 종이배 모놀로그
벽골제의 초혼으로
듣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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