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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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은 비어 있기 이전에 이미 넘쳐 있었다
비어 있음이란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의 다른 이름이므로
유리는 투명함을 가장한 주장
“나는 나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가장 공격적인 은폐
얼음은 시간의 윤리다
형태를 유지하는 동안만 자신을 정당화하고
녹은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술과 술이 섞이는 순간
정체성은 즉시 사후 해석이 된다
원인이 결과를 설명하지 못하고
결과는 원인을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마신다
그러나 주체는 어디까지인가
입인가
혀인가 아니면 마시기로 결심한 그 이전의 흔들림인가
빨대는 직선이지만 경험은 항상 우회한다
의식은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면서 항상 늦게 도착한다
민트는 인식론적 사기
상쾌함으로 진실을 대체하고 설탕은 합의된 거짓,
모두가 좋아하면 존재해도 된다는 논리
쓴맛만이 증명이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다
잔을 돌리는 손은 세계가 나를 다루는 방식
중심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 집요하게 반복된다
테이블 위에는
질문들이 흘러내려 바닥에 스며들고
바닥은 그 질문들을 구조라고 부른다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세지 않는다
그저 사라진 것의 방향을 가리킨다
미래는 아직 없어서 무겁고 과거는 너무 많아서 가볍다
마지막 한 모금에서
의미는 포화 상태가 된다
나는 삼키지 못한 채
멈춰 서 있고 그 정지가 나를 잠시 존재하게 한다
빈 잔을 내려놓는 순간
주체는 해산되고 경험만 남는다
그러나 경험은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기억되지 않는다
결국 칵테일 한잔이란
세계가 나를 생각해보았다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결론내리는 짧은 실험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를
우리는 취기라고 부른다.
댓글목록
이장희님의 댓글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세지 않는다]
칵테일 마셔본지 언젠지 생각도 안나요.
분위기 있는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블랙러시안 칵테일 한잔 마시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세계가 저를 통과해간 흔적에 저만의 철학을 입혀 보았는데
시가 실험 보고서처럼 흘렀네요.
시인님의 따뜻한 흔적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미소님의 댓글
글라스 뒤의 철학자
멋지십니다, 수퍼스톰 시인님 ^^
수퍼스톰님의 댓글
ㅎㅎ 철학자라니요. 돌팔이 철학을 끌어다 땜질하려니까 힘드네요.
편안한 밤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