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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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함은 늘 다용도실 선반에 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붉은 십자가는 하얀 벽에 박힌 느린 심장처럼 깜박인다.
그 안에는 붕대 대신 어제의 목소리가 말려 있고
소독약 병에는
울다 남은 저녁이 투명하게 담겨 있다.
가위는 잘린 적 없는 관계를 미리 벌려 놓고
핀셋은 몸속으로 숨어든 질문을 집요하게 집어 올린다.
여기엔 설명서가 없다.
피가 나면 무엇을 할지
사랑이 과다 출혈을 일으킬 때 어디를 눌러야 하는지
아무도 적어두지 않았다.
나는 반창고를 떼어
이마가 아닌 기억 위에 붙인다.
기억은 항상
가장 늦게 아물기 때문이다.
구급함 속 온도는 계절을 모른다.
겨울에도 체온을 유지하는 작은 방,
그 안에서 아픔들은 서로의 상처를 응급 처치하며 밤을 샌다.
나는 가끔 아무 약도 꺼내지 않은 채
구급함 앞에 서 있다 간다.
열지 않은 구급함속의 비상약품들이
나보다 정직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급함은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
완치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반위에 올려놓은 작은 사각형 안에서
삶은 여전히
임시로 유지되고 있다.
댓글목록
맛살이님의 댓글
엄살을 구분 해 내는 구급함 신기합니다.
아무쪼록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시인님도 늘 건강하십시오.
이장희님의 댓글
시인님 구급함에는 구급함의 사연이 많군요.
구급함로도 이런 좋은 시를 빚어 내시네요. ㅎㅎ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마지막 연이 마음이 깊어지네요.
늘 건필하소서,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집에서 작은 물건들 고치거나 조이다가 손을 다치면
이동식 구급함을 열어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지요.
붉은 십자표가 임시의 구원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새로운 한 주간 활기차게 열어가십시오. 이장희 시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