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의 경계에서 태어나는 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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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기는 스스로의 손잡이를 잊은 채
새벽의 뒤쪽에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골목처럼 휘어 있어
앞선 순간이 뒤꿈치로 밀려오고
아직 오지 않은 과거가 턱선 위에 굴러다닌다.
칼날들은 숫자를 모른다.
대신 꿈의 두께를 단위로 잘라내며
무표정한 공기 속에서
피도 없고 피부도 없는 면이라는 개념만을 다듬는다.
나는 손을 뻗지 않았는데
손이 먼저 나를 쥐고 있었고,
그 손의 중심에 면도기가 무중력의 꽃처럼 피었다.
그 꽃잎은 닫힐수록 열린다.
거울은 한 번도 나를 반사한 적 없었다.
대신 얼굴을 잃어버린 나들이
여럿 겹쳐진 지도처럼 흔들렸고
면도기는 그 경계선을 따라
뿌리가 없는 털들을 아마도 라고 속삭이며 베었다.
수염은 떨어지지 않는다.
대신 작은 점성의 구(sphere) 로 응축돼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네 번째 방향으로 미끄러져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건
표면인지, 기억인지, 혹은 빈 공간의 문장인지조차
판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찰나,
면도기는 나를 펼친다
책처럼, 혹은 지도처럼, 혹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등장한 함수를 풀어내듯.
그러나 읽을 수 있는 쪽은 아무 데도 없다.
그저 매끄러움이 하나의 언어가 되고
그 언어가 나의 음성 대신 공간의 골짜기로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깨닫지 못한 채 깨달았다고 믿는다.
면도기는 실체가 아니었고
차라리 잘린다는 사건의 잔향 같은 것이었음을.
댓글목록
콩트님의 댓글
보통 경계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이쪽과 저쪽을 딱 잘라 가르는 면도날처럼 날 선 실선이 떠오릅니다. 경계가 선이 아닌 면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애매모호한 구역에서 좀 더 치열하게 이쪽과 저쪽을 오래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골목처럼 휘어 있다는 표현이 너무 좋아 몰래 주머니에 넣고 가져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수퍼스톰님의 댓글
좋은 말씀으로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 맛있게 하시고 좋은 오후 시간 열어가십시오.
이장희님의 댓글
각연 하나 하나 표현들이 참 좋네요.콩트 시인님이 말하신 골목처럼 휘어 있다는 표현 저도 좋습니다.
면도를 하면서도 난 이런 시 한 번 쓰지 못하고 쩝~ㅎㅎ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매일 아침마다 얼굴에 면도날을 대야 하는 번거로움,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위에서 저와 아침을 다듬고 난 잔향을 그려 보았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시인님.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면도기 하나로도 이렇게 좋은 시를 빚으시는 군요.
잘 감상하고 갑니다,
몰아일체의 경지를 느낍니다. 수퍼스톰 시인님~
수퍼스톰님의 댓글
부족한 글에 과찬이십니다.
요즘 시상을 낚는 것도 어려워 책을 보다가 운 좋게 키워드를 얻으면
그걸로 고민해 보는 상황입니다.
늘 건필하소서 시인님. 감사합니다.
코렐리님의 댓글
이미지로 시를 쓰시는 데 관심이 있으시다고 하시니, 한 말씀 드리면, "개념"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이미지 시에는 가장 큰 적입니다. 말로 그냥 설명해버리려는 것 - 그 직접성이 쓰는 이에게는 유혹이 강하죠. 내 속에 있는 것을 마치 읽는이에게 던져버리듯 투사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미지 시에는 큰 적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라 하고 지시하는 것도 이미지 시에는 큰 적입니다. 쓰는 이 입장에서는 큰 유혹이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독자 마음에 그대로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이런 것을 모두 배제한 채 순수하게 언어로만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보는 것이 순수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미지 시에 한정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수퍼스톰님의 댓글의 댓글
네~ 주신 말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나plm님의 댓글
머둘다 갑니다
건필하십시요!
수퍼스톰님의 댓글의 댓글
시인님 다녀가셨네요.
좋은 휴일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