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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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앞 공터에 묶어서 세워 둔 깻단들이 짙은 갈색으로 말라간다. 수완 좋은 장삿꾼이 돈을 그냥 놀리지
않듯, 농부들은 땅을 놀리지 않는다. 누구네 땅인지 몰라도 농부들의 얼굴은 여러 명이다. 김장 작물들이
깻잎의 물결이 빠져 나간 자리를 차지하고, 그 푸름을 대신하고 있다. 어쨌거나 선뜻 건물이나 집이 들어서지
않고 오랫동안 그곳이 공터여서 나는 좋다. 세상의 논 밭들은 이렇게 지구를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마루에 서면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서 부터 미래의 식량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3d프린트기로
식량을 찍어 낼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정말 지구는 더 이상 푸를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루 종일 어제 마신 술을 깨느라 잠만 잤다. 모처럼의 휴일 무엇인가 특별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것은
욕심인 것 같다. 사실은 만땅으로 충전하는 휴대폰 보조 밧대리처럼 조금도 방전을 하지 않고 하루를
푹 잘 수 있다면 그것처럼 완전한 휴일이 없는 것이다. 주민등록 등본을 떼고, 보건증을 만들고, 오후
여섯시를 앞 두고 간당간당 휴일로 밀쳐 두었던 숙제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 아이도, 작은 아이도
무사히 직장을 잘 다니고 있다. 엠비씨 방송국 카메라 보조로 취직했다는 작은 아이는 지금까지 했던
일 중 가장 재미 있어 하는 것 같았고, 주 야 교대 근무를 하는 큰 아이 역시 지금까지의 백수 시절을 만회
하려는 듯이 열심을 부리고 있다. 내가 종일 자니까 내 옆에 누워 종일 잠을 자던 늙은 개도 아직은
건강하다. 개가 죽기 전에 개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그냥 눈 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을이 가고 있다. 겨울이 올 것이다. 작년에 야쿠르트를 시작했던 것이 십일월이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결정 된 것이 이 무렵이였던가? 조금 지나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티브이 화면에 잠깐씩
자주 비치는 그녀의 얼굴이 참 않되었다. 사람에겐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이나 상황을 있던 그대로 보존
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 있나보다. 그녀는 대통령의 딸이거나, 대통령이거나 하는 모습을 잃어서는 않될 것
같고, 대통령의 딸이거나 대통령이 아닌 그녀의 모습은 무엇인가 잘못된 일인 것 같다. 머리를 질끈
동여 묶고, 손님이 밀려드는 시간의 나처럼 정신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왜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내가 새벽종이 울리면 일어나던 그 시절, 보일러공이였던 아버지의 딸로 살면서 단 하루도 누려 본 적이
없었던, 대통령의 딸로서의 호사가 그녀에겐 계속 지속되어야 할 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 공장 여공이였거나, 식모 살이를 했던 할머니들이 죽어라고 그녀를 위한 태극기를 흔들어 대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그녀의 참담을 대하는 것이 불편해진다. 이제 그녀가 이십년간 적을 두었던 당도,
지금까지 그녀를 변호했던 변호인단도 그녀를 떠난다고 들었다. 무슨 까닭인지, 지금 그녀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편지 한 통을 보내주고 싶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당에 투표를 해 본 적이 없고,
그녀가 탄핵 될 때 너무 기뻐서 술잔을 부딪혔던 사람인데, 이 겨울, 그녀에게 맞닥뜨려질 혹독한 추위가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다. 야쿠르트를 한다고 사방에서 바람이 달려오는 길가에 서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지나가던 새댁이 건내준 따뜻한 벌꿀 음료수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병의 약간 뜨거운
온기가 다 식을 때까지 두 손으로 감싸쥐고 눈물이 흐르면 바로 얼 것 같아 눈물을 눈시울속에 집어 넣느라
애를 먹었었다. 유엔에 인권 침해를 호소 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따뜻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미 모든 것을 잃지 않았는가? 이미 그녀는 물을 잃은 물고기다. 물을 잃은 물고기도 회를 떠먹거나
죽기 전에 바닷물을 쿨러에 채워주듯,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따뜻함은 이 겨울에 누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래서 나 같은 서민이나 시민은 늘 피지배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동장군이 납시고 있다. 눈을 기다리긴 하지만, 이곳 진주에 눈소식은 죽은 애인 소식 같다.
열심히 일해서 살이 빠지면, 겨울이여서, 추워서 땟깔나는 예쁜 털 코트를 하나 사 입어야겠다.
그것 입고 뽑내느라 가는 겨울이 아깝도록 말이다. 그것을 입고, 남편과 함께 지리산 정령치에
종이 커피를 마시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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