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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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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김용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1회 작성일 26-03-17 04:17

본문

차가운 이성

지도 위에서 스위스는 작다.
인구 900만 명, 면적은 남한의 절반도 안 된다.

하지만 숫자로 본 스위스는 거인이다.
1인당 GDP는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를 넘나든다.
미국의 1.3배, 한국의 3배다.

더 놀라운 건 방어력이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 공포에 떨 때, 스위스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대를 유지, 실업률은 2% 초반으로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다.

게다가 14년 연속 '세계 혁신 지수' 1위를 놓치지
않는 강소국. 자원 한 톨 나지 않는 내륙 산악 국가가
어떻게 이런 경제 요새를 구축했을까.

노바티스, 로슈, 네슬레 같은 초일류 기업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힘은 국민들의 머릿속에 있는 '계산기'다.

우리는 흔히 스위스 앞에 붙는 '영세(永世) 중립국'.
여기서 '영세'는 구멍가게를 뜻하는 영세(零細)가 아니라
영원한 세월을 뜻하지만 그 어감이 주는 나약한 이미지가
있는 탓에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납작 엎드려 평화를 구걸하는
약소국의 생존술쯤으로 오해한다.

착각이다.
스위스의 중립은 평화주의자의 호소가 아니라,
싸움꾼의 '무장(武裝) 중립'이다.

그들은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는다.
내 나라 안보를 남에게 '외주' 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알프스산맥 전체를 거대한 지하 벙커로 개조하고
전 국민이 총을 든다.

"우리를 침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너희도 팔다리 하나는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 서늘한 '고슴도치 전략'이 그들의 평화를 지탱하는
기둥이고, 이런 자세가 바로 1, 2차 세계대전도
피해 가게 만든 원동력이다.

이 '공짜 안보는 없다'는 처절한 독립심은, 경제 영역으로
넘어오면 '공짜 점심은 없다'는 냉철한
주주(Shareholder) 의식으로 치환된다.

스위스 국민은 안보를 동맹에 구걸하지 않듯, 경제적
풍요를 정부에 구걸하지 않는다.

스위스에는 국민 10만 명이 청원하면 전 국민투표를
강행하는 특이한 법이 존재하고, 그들 정치에도
물론 진보당이 존재한다.

지난 2012년, 스위스에선 '유급 휴가 연장' 안건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법정 휴가를 4주에서 6주로 늘리자는 법안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감성언어와
"노동권 보장"을 외치며 90% 정도의 찬성으로
통과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스위스는 66% 반대, 부결이었다.
이유는 심플했다.

"휴가를 늘리면 인건비가 오르고,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면, 결국 내 일자리가 사라진다."
노동자가 기업의 손익계산서를 걱정해 휴가를 반납했다.

2016년엔 더 파격적인 '기본소득' 안건이 올라왔다.
전 국민에게 조건 없이 월 2,500프랑, 당시 환율로
약 300만 원을 주자고 했다.

우리는 25만 원만 뿌려도 "민생 회복"이라며
생색을 내는데, 스위스 국민은 매달 300만 원을
준다는데도 무려 77%가 걷어찼다.

"재원은 세금 폭탄으로 돌아올 것이고, 일하지
않는 자에게 돈을 주면 나라는 빈 껍데기가 된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는 사실을.

압권은 올해 치른 투표다.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초부유층 상속세 50% 부과' 안건이 올라왔다.

한국이었다면 '조세 정의'를 외치며 죽창가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78% 반대로 부결됐다.
스위스 국민들은 부자를 털면 그 돈이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라,
자본과 기업이 세금 싼 나라로 탈출해서 스위스 경제가
망가진다는 경제학 원론을 꿰뚫고 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겠다는 집단 지성이었다.

이들이 쌓은 '신뢰 자본'은 다가올 AI 시대에 빛을 발할 것이다.
스위스 기업들은 국민이 자신들을 지켜줬다는 고마움을 안다.

인력이 AI로 대체되는 급변기가 와도, 기업은 국민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최대한 속도를 조절하며 상생을 모색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최후의 안전 망이다.

출처 : 작자/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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