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시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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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시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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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김남주
우리는 술에 취해 무궁화
무궁화 흙바닥에 선을 죽 그어놓고
꽃이 피었습니다
내가 술래,
무궁화는커녕 나무 하나 없는 운동장에서
너희들은 내게 다가온다 한 발 두 발
시치미를 떼며
나는 노래를 부른다 전주도 후렴도 없는 첫 소절이 마지막 소절인
그러니까 반복해서 불러야 해 노래가 끝나지 않도록
놀이가 끝나지 않도록 한 소절이 노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노래보다는
구호에 가까운 한 문장을
우리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집 안에는 우리가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뒤의 인기척
무엇인가 오고 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끊어지는 서늘함
우리들은 달린다
우리가 그어놓은 출발선을 향해
저기서부터 출발이야,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울지 마 울지 마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모두 혼내주자
그게 설령 우리를 낳아준 사람이라도
이 도시는 깨끗해서 외롭고
무엇인가 오고 있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재난 경보 문자들
일기예보처럼 읽어내는 재난말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선명해지는
나를 웃기기 위한 해괴한 표정과 자세말고
뒷덜미에 울리는 숨소리
과장된 웃음소리
오고 있어,
무궁하고 무진하고 꽃 같은 것들이
출처 : 202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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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쇠 수지
최애경
검지를 올려 놓은 방아쇠를 당긴다
돋보기 쓴 총앙이 과녁을 wkcsms 동안
불거진 힘줄 사이로
낯선 이름 박힌다
수선실 조명 아래 물 빠진 상표들
손가락 딸깍딸깍 맞접힌 한 평 햇살
깡마른 실 꾸러미가 땀을 따라 같이 뛴다
실밥 푼 얇은 오후 입에 문 졸음 한 올
주름을 당길 때마다 굽어지는 손가락
약속을 놓을 수 없어
펼 수 없는 순간들
*방아쇠 수지: 손가락을 펼 때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저항감을 느끼는 질환
출처 : 2026년 부산일보 신춘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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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 익스프레스
최애경
몸 하나가 집인 거북이를 알고 있다
다리가 짧아서 하루는 높고 멀지만
이삿짐 사다리차에
고층이 특기라지
딱딱한 등껍질에 냉장고가 실리고
수입산 바닥재엔 뒤꿈치도 무거웠다
밤에야 뉘어보는 몸
꿈조차 등이 휘는
반쯤 낮은 방 한 칸,
더 낮은 오늘이지만
물소리 모이는 방 여기가 출발이지
느려도 단단한 생을 업고
바다로 가는 중이다
출처 : 2026년 중앙일보 신춘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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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된 글씨체
김순호
글씨란 씨앗들이 옹아리를 풀고 있다
가뭄에 묻어둔 말 쭉정이가 다 됐어도
갈증 난 어둠 속에서
물이 올라 눈뜬 시간
문해교실 화분 속 오래 묵은 뿌리들
깜냥껏 밀러 올려 뻗어가는 흘림체
불거진 손끝 마디마디
환한 길 피고 있다
남은 숨 불어넣는 꽃주름 버는 소리
굴곡진 삶의 줄기 향기로 감아올린
활짝 핀 칠곡 할매체 부푸는 꽃잎 활자
출처 : 2026년 동아일보 신춘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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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김순호
가면을 앞세우고 표정을 갈아 끼워요
고객님 만족도 조사 무겁게 깔린 하루
한 끼의 오늘 앞에선
웃음이 최선책이죠
가짜로 살다 보면 진짜도 가자 같아
눈웃음 속에는 씁쓸함도 피고 지죠
실적을 향해 달린 s
무리의 무리수들
뾰족한 갑의 말도, 을을을 받아주고
반색은 여기까지 웃거나 삼키고 난
모래알 굵게 씹히는
하루치 감정의 바닥
출처 : 2026년 농민 신문 신춘문예 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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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 댐퍼
최광복
바람을 읽어내야 꼿꼿이 설 수 있다
수백 톤 무게추를 허공에 매달고서
희미한 박동 소리에 주파수를 맞춘다
찢어질 듯 팽팽한 장력을 거스르며
밀려드는 욕망을 가까스로 잠재워도
마음은 순간을 흔들며 균열을 일으킨다
태풍도 지진도 한 눈금씩 받아적듯
파동을 되새기며 다시 서는 몸의 경계
아득한 떨림을 안고 낮과 밤에 귀를 댄다
*윈드 댐퍼: 초고층 건물의 중심을 잡는 장치
출처 : 2026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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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김밀아
가늘고 긴 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
향기가 더듬이를 떠날 때까지
아무도 보지 않는데 가끔은
양면을 펴서 평평하게 엎드렸다가
꽃 빛에 반해서 얼굴을 대는 동안
바람은 날개를 붙잡고 꽃대는 휘청거려
어디선가 물방울도 듣고 있는
펴졌다 구부러지는 입의 모양
모았다가 벌어지는 어깨가 넓어진다
꽃가루가 묻으면서 공중에서 깊게 무늬들이 박히고
날개끼리 빠르게 부딪치면 앞으로 뒤로 숨막히게 반짝이고
앞으로 뒤로 떠 있는 동안 고요하게 부서지는 살갗의 비늘
양 날개 위에 마주 보는 몸의 문양은
마른 공기 속에 펄럭이는 두 장의 꽃잎
후드득
떨어질 것 같다가
구불거리며 솟구치다가
따사롭게 앉아 있다가
날아갈까
날아갈까
날아가는 나비
출처 : 202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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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의 저녁
이복렬
땅거미가 내려오면 등줄기가 더 시리다
등 기댈 곳 하나 없는 앞뒤가 허방이라
가로등 물을 밝히는
저문 거리로 나선다
차디찬 바닥 짚고 맨몸으로 버틴 나날
퇴근족 틈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득한 허공을 뚫고
별 하나가 떠 온다
눔꽃 핀 나뭇가지 뼈가 신린 엄동에도
먼 봄을 채근하는 깃 고운 새는 있어
쇼원도 마네킹들의
옷차림이 가볍다
꽉 막힌 네거리를 활짝 여는 초록 신호
자동차 불빛 따라 발걸음이 빨라질 때
언 강이 용틀임하듯
닫힌 문이 열린다
출처 : 202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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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
배종영
열 달 동안이나
엄마 속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엄마를 모른다
그런데 엄마는
고작 열 달 동안 안고 있었음에도
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
막연,
그렇게 막연은 배운 것 같다
세상이 천애(天涯)의 무인도 같을 때도
엄마가 목선 한 척 노 저어
내게로 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그 믿음은 늘 편도여서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지 내가 다가간 기억은 없다
없는 곳이 없는 엄마,
나는 늘 그 엄마의 가없는 믿음이었지만
한 번도 그 믿음, 되돌려준 적이 없었다
인형 속에 똑같은 인형들이 겹겹이 들어 있는 마트료시카
몇 겹의 엄마를 벗기고 벗겨 나를,
막연한 나를 두었다
엄마 속엔 늘 엄마와 똑같은 엄마가 겹겹이 들어 있었지만
나는 늘 그렇게 홑겹이었다
엄마는 엄마 속에 엄마를 숨겨놓고
혹시나 그 엄마 닳아 없어질까,
내어 줄 엄마가 다 떨어질까 전전긍긍했다
나는 지금껏 도대체
몇 명의 그 엄마를 우려먹고 살아온 것일까
엄마를 떼어낸 내 몸의 흉터들
어느 날 문득 그 흉터가
저릿저릿 저려온다
지금은 아무리 엄마를 열어 보아도
엄마 속엔 거듭된 손길의
그 엄마가 없다
출처 : 202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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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은 백 그램
오시내
봉합해야 열리는
그 속은 통제구역
불안한 내 눈동자
문앞에 꽂혀있고
마다른 한 남자의 길
누운채 잇고 있다
직장이 잘리기전
곪아 가던 깊은 그 속
뒤축이 무너질 때
흔들리는 두 어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말단은 짧아졌다
애 터진 날이 모여
아파오는 시간에
떼어낸 백그램 만큼
내 안이 길어지면
차갑게 식었던 몸은
온기로 돌아올까
출처 : 202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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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유주연
햇볕이 산등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새들은 마른 낙엽 밑으로
고개를 집어넣고 있었다
항아리는 토방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마른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의 가슴도 조각나고 있었다
대답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새는 그들의 마른 처소에서 울고 사람은 제단 아래에서 멍해지고 있었다
텁텁한 입과 질어진 머리 안팎으로 미처 울음이 되지 못한 슬픔들이
무음으로 울고 있었다
빛은 점점 옅어졌고 대지는 뜨거워졌으나 흙은 짙어지고 퍼즐처럼 갈라졌으나
몸들은 결코 따뜻해지지 않았다
영혼들은 스스로 자기를 먹으며 버텼다
때로 단지 마른 고기와 치즈가 그려진 금빛 액자틀 아래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없는 목소리로 벙어리처럼 호소하고 있었다
햇볕이 산등 뒤로 또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넘어가고만 있었다
가뭄이었다
가뭄이었고
가뭄이었다
새들의 눈물이 낙엽을 적시고 있었다
사람의 모은 손이 신앙을 넘어가고 있었다
결정적 형태가 주어지지 않았다
가뭄이 깊어지고 피가 굳어가고 식량이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출처 : 202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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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펄 여자
김경덕
파도 소리 기울여 미세기를 읽지요
한창때엔 난바다의 깊이까지 가늠했지요
해감내 찌든 가슴에 펄을 펼친지 오래
망둥이가 뛰어오르고 바지락이 숨 쉬어요
뱀장어 따개비 저어새를 수태해여
꽃게가 하트 깨물어 못쓰게 된 젖꽃판
차라리 메마르지 넘쳐흐를지 않을 거면
배를 밀던 사내들은 죄 어디로 내뺐나
갯바다 물비늘 조으는 목, 한참 맑습니다
출처 : 202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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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피자
이유나
그 많은 상처를 누가 다 먹어 치웠나
나는 늘어질 대로 늘어지는 생각을
손가락 끝에 올려 돌리다가
찢어지거나 터지면 다시 뭉개기를 반복하지
찢어지고 터져야 꽃이 핀다던
당신의 속내를 끝내 모르고
잘 부푼 생각을 펼친다, 얇고 넓게
펼쳐놓은 생각을 정해진 틀의 크기로 자르면
동그랗게 잘린 생각을 기다리는 건 찌르기
바닥을 친 생각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내듯
찌르는 순간엔 감정이 섞이면 안 돼
감정 없이 피를 연기하는 토마토소스
온몸에 펴 발라 진동하는 음모엔
동원되는 공범들이 있지
새우가 세우는 계략을 배후로
페퍼로니 올리브 포테이토 치즈는 듬뿍
조커를 능가하는 치즈에 애정을 담아
달궈진 불가마 속으로 밀어 넣지
뜨거운 건 순간이야, 상처는 쭈욱 늘어나겠지
터진 수포처럼 활화산이 된 상처 위에
파슬리는 독이 될까 약이 될까
병을 줄 때는 약도 준다는 신에게
새벽의 싱싱한 루꼴라를 올릴까 해
방금 딴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자르고
초록 들판 위에 꽃처럼 피우면
이때다 싶을 때 마침내 쏟아내는
세상의 모든 상처는 향기롭지
피처럼 달큰하게
꽃을 피우지, 가지가지 상처마다
새들은 몰려와 노래하지
피자피자, 봄봄봄
출처 : 2026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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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리모델링
하은주
노후 된 풍경들이 해 넘어 기울 동안
금이 간 석양 끝이 조금씩 갈라지고
틈새로 메우지 못한 말들이 흩어진다
햇살이 조심스레 당신을 훑을수록
침묵의 그림자는 구석으로 밀려나고
굳어져 긁어낸 자리 마디마디 아리다
나란히 걷던 줄눈 지평선은 어긋나도
드릴로 뚫린 산은 부드럽게 스러지며
우리가 지어질 자리 꽃대가 솟고 있다
출처 : 2026년 경남 신문 신춘문예 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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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털
이수빈
빈 종이에 선을 그어 달력을 만들었다
허술한 약속을 칸에 넣기 위해서
직선은 고집이 세서 눈 맞춤이 어렵다
사는 건 계속해서 선을 긋는 일이야
글씨든 사람이든 전선이든 심전도든
타래가 끊기지 않도록 미로를 걷는 일
연속이 미분을 보장하진 않는다
끊어진 도함수로 숨 쉬어도 삶이라면
숫자를 훌쩍훌쩍 제자 아나둘셋 다섯여덟
사람들은 나에게 눈을 보라 다그친다
종이에는 달마다 이름이 적히고
끝없이 자신을 반복하는 눈송이가 쌓인다
*프랙탈(fractal)은 부분과 전체가 닮은 모양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조다.
출처 : 202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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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아래의 解剖
이주연
붉은 것들은 언제나 안쪽에 있었다고 나는 오래 믿어왔다.
심장과 허파와 콩팥뿐 아니라, 어떤 날은 팥알이나 기장 같은
곡물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듯 비유적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많은 윤리적
부담을 남기는지. 얇은 껍질도 쉽게 갈라지지 않았고
두꺼운 곱창 같은 질감은 오히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살아 있는 것의 내부는 언제나 열림과 닫힘 사이에서 이름을 잃고
그래서일까, 나는 가끔 사람들이 서로의 속을 보기도 전에
완전히 오해해 버리는 방식을 떠올린다.
전쟁 중인 지역의 아이들이, 혹은 지구 반대편에서
하루를 버티는 생명들이,
어쩌면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자신의 안쪽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름빛 능소화가 한껏 타오르던 날,
나는 세계가 얼마나 쉽게 재와 꽃의 모양을 혼동하는지를 목격한다.
살아 있다는 이유로 부패를 택하거나, 부패 속에서도 빛을 택하거나,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선택이거나, 어떤 생은 갈라서
보아야만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손에 묻은 것들의 쓴 온도를
허무도, 사랑도, 비릿함도 결국은 한 덩어리의 생에서 조용히
태어나는 것, 능소화 아래에서 나는 그 사실을 더 늦게 알았다.
너무 늦게.
출처 : 2026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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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
최은영
원탁을 들인다
앉을 사람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계란은 삶아 놓는다
깨지는 것을 싫어할지도 몰라
비 오는 날
물을 뚝뚝 흘리며 우산도 없이 언니가
오면 좋을 것 같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닦아주고 원탁으로
끌어당겨
따뜻한 감자 스프를 한 그릇 먹게 하고
할 이야기가 없으면
울다가 잠들었던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저녁이면 모여드는
어느 집 식탁처럼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끼어 앉아서
불에 구운 가지에 양념을 붓다가
흘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얼굴들
흩어져 목청을 높이는 붉은 목소리들
오므린 발가락을 펴지 않고 깨진 접시를
쓸어 담지 않고
하얗게 찔린 눈으로 마주보고
서로의 등에 모르는 글자를 새기고
지나간 밤은 잊어버린다
출처 : 202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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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힘
황보림
벽시계 추처럼
끊임없이 움직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듯
코끼리 코가 좌우로 물체를 감지하고 있다
물렁물렁한 살덩이가 때로는 철심처럼 튼실하게 중심을 잡는다
불어닥치는 바람 한 줄기도 거침없이 말아 올리는 촉수
태엽은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수단이다
억센 풀밭을 헤집으며 작은 풀 하나도 능숙하게 뽑아내는 것은
늘 바닥을 직시하는 긴 코의 연륜 때문이다
한여름 수렁논에서 김을 매던
뚝심 깊은 아버지의 팔뚝이 그러했다
논바닥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벼와 벼 사이에서
보호색을 띠며 점령해 오는 피*를 용케도 골라 뽑아내셨다
움푹 짐푹한 들녘을 평평하게 펼쳐내는 두 팔
질척한 개흙 속을 훑어 내며 벼 포기들을 퍼렇게 키워냈다
뭉툭하고도 세심한 아버지의 근육
직립과 중력 사이 검붉은 현을 켠다
태엽을 감고 돌아가는 괘종시계처럼 멈추지 않는 아버지의 톱니바퀴 소리
무거운 짐 짊어지고
먼 트레킹 길에 나선 코끼리처럼
농로를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농투성이
아버지 발걸음이 시계추처럼 다시 수렁논을 향한다
중력의 끈은 참으로 질기다.
* 피 : 볏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
출처 : 202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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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사강은
오늘 경찰이 내 집에 들이닥쳤다
문을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내가 할 말을 경찰이 했다 이러시면 어떡해요
분명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나를 연행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수갑을 채우고 서로 데려갔다
원래 이런 식으로 이뤄집니다
생각해 보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랬던 것 같기도 그것들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니까 이런 식이 맞는 것 같기도 죄는 나의 것이고
벌은 경찰의 것이라 했다
역할은 바뀔 수 없어서 그 사실 역시 바뀌지 않을 거라 했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해 놓고 나 먼저 말해 보라 했다
아무것도 알려 준 적 없으면서 대답하라 했다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라 했다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 말해 주지도 않고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라 했다
나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취조는 인정할 때까지 계속됐지만
알지 못하는 일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불쌍하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자 유리창 건너편에 있던 다른 경찰이 들어오더니 증거가 없어서
풀어 드린다고 원래 법이 그렇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것도 어딘가 많이 본 장면 같아서 감사합니다
대신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소리가 나왔고 경찰서는 문 닫을 시간이 됐다 조사실 밖 마지막
계단까지 내려가 바닥에 도착하자 더 이상 경찰서가 아니었다
그때 평생 지었던 죄가 모조리 기억났다 손목에는 수갑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출처 : 2026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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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의 밀도
김유진
저기 회오리가 있을 것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네 곁에 결코 갈 수 없다
머리카락은 마구 흩날리고 있을 것이다
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다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으로 앞으로도 영원히 네가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거기 있는 숨의 율동
어떤 공간을 가득 채웠다가 빠르게 빠져나간다
다시 또 숨이 공간을 채웠다가 빠져나가며 주변을 빨아들인다
내게서 나온 숨이 거기 붙어 따라간다
끝까지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숨에 붙은 또 다른 숨
떨어져 나간 숨은 외곽에 몸을 맞추고 있다
꽉 차게 몸을 부풀린 숨은
중앙의 밀도가 낮아지고
겹치는 숨으로 인해 꾹꾹 밀려 밖으로 표면을 붙이고 있다
회오리의 가운데가 비어 있다는 정보는 지금 관찰한 결과가 아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진술은 가능하다
사실 공기는 움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묘사를 시작한다
숨은 쉬어지지 않았다
누구도 탄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끝내 닿지 않았다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공간을 가진 적이 없다고 한다
보지 않은 것들은 우리가 회오리를 거친 적이 없다고 지시한다
보이지 않는 지시는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젖어 있다고 바람이 불고 천이 펄럭이고 떠나는 것들이 늘 있었다고
우리는 소통한다 묘사는 없을 것이다
단절된 분노 예상 환희 격정들이 가득 찼다 비워진다
우리는 품었던 것뿐이다
아니다 우리는 품었던 적이 없다고 묘사는 말한다
우리는 공간의 격동을 거치고 살아남은 적이 없게 된다
기억은 묘사가 아니다
보이는 것을 묘사하지 않기로 한 기억 때문에 우리는 여기 남았다
출처 : 202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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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감정
권라율
여름도 여름이랑 사이가 좋아야 해요
김정 씨랬죠? 김정 씨, 생각은 파도를 타죠
김정 씨가 굴러요 돌돌
몇 달 아니 몇 년 끙끙 밀린 연차가
달려가는 달력이 달달 시계가 흘낏
소금사막이나 빙하는 진작 품절이고
영어도 못 하고 할랄 음식도 모르면서
그저 구를 만큼 구르고 싶어서
파도와 한 몸으로 조는 붉은가슴도요
생각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라서
만국기 휘날리는 유람선 갑판 뒤에 올라탄
먼지 낀 동네 버스처럼
차창 가까이 날아드는 불빛에
이물감으로 흔들려요
홍학의 부리나 들소 뿔의 파편
흰 산봉우리를 기어가는 설표의 꼬리뼈
가끔 캐리어 속 번뜩이는 칼날들
깊숙이 넣어둔 조약돌 몇 개
퇴근길 당신은
뜨거운 낮에 든 서늘한 목덜미에 화들짝
밤낮이 서로 먼 날이네
당신은 턱까지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우며
허리 버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구겨진 잠은 주말로 접어두고
맥주 한 캔에 다시 펼쳐 보자 할 때
돌돌 툴툴 구르며 어느 선창가
후미진 호텔로 들어가는 캐리어 하나
아무 방이나 주세요
당신은 마른 빵 한 조각으로
오줌내 나는 바닥으로 앉아
비로소 캐리어를 열어보려는데
수천수만 킬로미터 밖에서도
꾹 다문 입술의 여권과 꾹꾹 따라온
여름 저녁이라는 감정
오로라를 보러 갈 걸 그랬지?
오로라에는 여름 감정이 없다는 듯
딴전을 피우는 김정 씨
극야의 눈동자는 별의 미간만큼이나 멀어서
신은 목덜미에서 허리춤에서 자꾸 흘러내린대요
하늘이 맥없이 툭, 떨어지면
느린 목 근육을 키워야지
벽을 가로지르는 바퀴벌레의 다리 힘처럼
성경이나 코란 불경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김정 씨, 소뇌 대뇌에도
운동장이 있어 지퍼를 열면 빛과 구름 바람이
우르르 쏟아진다더군요?
하늘만 한 운동장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를 줄곧
온 우주가 달려온 거라면요?
먼지 날리듯
홍학 부리가 차창에 부딪히듯
설표가 당신이 돌진해 가는 거라면요?
캐리어 속에서요 무한한
김정 씨, 돌아서 어느 여름 중이신가요?
세 시에는 세 시의 눈동자가
다섯 시에는 다섯 시의 눈동자가
성운 사이 흩날리면서
출처 : 202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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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지팡이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공광복
흰 지팡이가 저어새처럼 걸어간다
비 오는 점자블록 길을
지팡이는 저어새 부리 흉내내는지
나는 문득 흰 지팡이 심정이 궁금해져서
우산을 접고 눈감고 우산 끝으로 길 만져본다
점과 직선으로 돋은 점자들
감각이 무딘 우산은 점자 떠듬떠듬 읽어서
눈 대신할 만한 것들을 호출한다
손, 발, 귀는 길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손과 발과 귀 끝이 고양이 수염처럼 뾰족해지는데
눈감으면 길은 벼랑에 놓인 외나무다리, 비는 내리고
다리 밑에서 급류가 헛발을 노리는 것 같아서
핑계로, 나는 그만 눈을 뜬다
물음표 같은 것들 빗물에 흘려보내고
고민 없는 길을 걷는다 노랗고 KS마크 박혀 있는
종종걸음도 아닌데 걸을수록 흐트러지는 발걸음
길이 나를 자꾸 넘어뜨리려 한다 나는 휘청거리고,
버스 정거장이 도로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는데
발목이 노인처럼 지쳐간다
이 길이 그의 길이라니
흰 지팡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신호등이 수 거꾸로 세며 불안한 눈 끔벅거리는데
점자 없는 길바닥 읽느라 난감한 지팡이와
움츠러든 엄지에 붙어서 길 더듬거리는 발가락들,
안개비 까닭 없이 추적거리는 사거리에
온몸 끝이 더듬이가 된 사람
길눈 어두운 지팡이 따라 밤길 가듯 걷는다
출처 : 2026년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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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자라는 날씨
이처음
엄마가 주간보호센터에서 자꾸 흐린 날씨를 가져온다
종종거리는 발자국에서 구름이 떨어지며 돌 굴러가는 소리를 낸다
돌멩이 소리는 엄마의 무성한 여름을 가져오는 전조 같은 것
콩잎보다 풀이 더 많은 밭이 따라 들어온다
여름이 다가오는 방향은 안개로 지은 옷처럼 뭉글 거리고 흐릿하다
거실이 비구름으로 가득해진다
뭉쳐진 구름은 앞과 뒤를 모르는 사이
식탁 아래 주저앉은 엄마가 풀을 뽑는다
종일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던데 안 피곤해?
때를 놓치면 풀이 동산이 돼요
그 말을 들어서 저녁이 풀씨 처럼 떨어진다
동글동글한 불빛이 비추는 손가락 끝에 먼 길
식탁 아래 펼쳐진 이랑과 고랑이 민달팽이처럼 고집스럽게 꾸물거린다
숨이 가빠진 엄마가 방향을 바꾼다
바닥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건 봄이 만들어지는 일
공중에 풀 무덤이 생기는 건 여름이 지나가는 일
밭이랑에 바람이 가득해서 식탁 의자가 이리저리 밀린다
계절을 잊은 날씨들이 한 데 붙어 지나간다
여름은 비가 많아
조용히 창문을 닫는다
출처 : 2026년 제38회 202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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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견
안진영
부슬비의 한 종류인가 싶었다
구름에서 직물 짜는 소리가 들리고 그 틈에서 뚝딱,
소나기 한 필이 완성되기도 했으니까
여러 겹을 뭉쳐서 두꺼운 소리를 뽑아내는 일과
넓게 펴 얇은 소리로 늘이는 일은 구름의 오래된 직조법이다
한 덩어리 물을 물 조리개에 넣고 따르면
거기, 몇 십 올의 조금 굵은 직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한 쪽으로 미끄러지듯 넘친 어제와
철커덕 기계의 틀을 빠져나온 오늘,
부슬부슬 종일 뿌린다는 말
한 올이라는 말은 모두 여름의 말 같다
구름이 끝단을 재단하는 오후 내내 나는
어린 나무의 새순 같은 옷감을
고르느라 계절의 숲을 지나온 것 같다
숲이 기계를 흉내내다 기계가 다시 숲을 흉내낸다고 생각했다
가장 더운 것이 여름이고
그 여름 속에 시원한 것이 섞여있다
인견은 오로지 식물성인줄 알았다가 잎이 많은 나무의 속껍질에서
찾아낸 그늘과 사나운 소리가 뽑아놓은 한 올 인 것을 알게 된다
올 여름엔 강우량이 적어
인견 생산 실적이 저조하다는 예보가 있다
모든 여름은 구름의 두께에서 온다
출처 : 202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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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쇠 수지
최애경
검지를 올려 놓은 방아쇠를 당긴다
돋보기 쓴 총앙이 과녁을 wkcsms 동안
불거진 힘줄 사이로
낯선 이름 박힌다
수선실 조명 아래 물 빠진 상표들
손가락 딸깍딸깍 맞접힌 한 평 햇살
깡마른 실 꾸러미가 땀을 따라 같이 뛴다
실밥 푼 얇은 오후 입에 문 졸음 한 올
주름을 당길 때마다 굽어지는 손가락
약속을 놓을 수 없어
펼 수 없는 순간들
*방아쇠 수지: 손가락을 펼 때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저항감을 느끼는 질환
출처 : 202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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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송이후
스님이 처마 끝에 동이를 놓아두었다
장마철 내내 빗물이 고였다
나는 새벽예불 전에 그 물을 든다
무겁다
동이를 기울여 세숫대야에 붓는다
물줄기가 끊어지지 않는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들이
동이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쏟아진다
열흘 전 하늘이던 것이
지금 내 손목을 적신다
나는 그 물로 얼굴을 씻는다
차갑다
이마에 닿는 순간 빗방울의 경계가 사라진다
어느 것이 먼저 떨어진 물인지
어느 것이 나중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세숫대야 바닥에 고인 물이
내 턱에서 떨어진 물방울을 받아들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스님이 마당을 쓸고 지나간다
빗자루 자국이 젖은 흙에 남는다
출처 : 202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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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린토피아
강하라
을지로에는 문이 없어서 문을 열 수가 없다
간판 없는 카페들이 벽돌 속에 숨어 있다
그것은 입구라기보다는 오래된 벽의 단면
우리는 손잡이를 돌린다
손잡이는 돌아가지만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어긋난 시차 속으로
두 몸이 미끄러져 들어갈 뿐
그러면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붉은 실 뭉치를 꺼낸다
그것을 지도라고 불렀다
가지 말아야 할 곳들이 가고 싶은 곳들을 지우며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그런 건 이제 버리고 싶어
나는 손을 끌어 할머니를 의자에 앉힌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맛대가리 없는 빵
씹는다 혀가 아리다는 것은 혀가 있다는 뜻일까
취향은 없고 씹는 동작만 남은 식탁 위에서
할머니는 계속 뒤로 간다
뒷걸음질 치는 것이 유일한 이동 방식인 것처럼
그렇게 스크린 앞으로 도착하고
이민자 여자가 산 정상에 올라 소리지를 때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단 한 번도 소리쳐 본 적 없는 목구멍이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그것은 16:9의 화면 비율 밖으로 밀려난
어떤 울음의 총량 같은 것
그리고 빙하가 조금 녹아내렸다는 증거
나는 그가 잠든 사이 지도를 훔쳐 세탁기에 넣는다
울 코스를 누른다 세탁기가 웅웅거리며 붉은 선들을
뒤섞는다 금지된 구역들이 젖은 휴지처럼 풀어지고
철조망이 녹아내려
이제는 지도가 아니고 축축한 양털 한 뭉치
탈수가 끝난 세탁기 안에서
할머니의 구겨진 몸을 편다
그것을 들춰 업고 가로등 아래를 걷는다
붉은 혈관들이 지도처럼 다시 돋아나고 있었다
달이 잠들 때까지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
출처 : 202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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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와 백기
김미희
백지와 백기
여기서 맘껏 놀고 있어,
엄마가 놓고 간 흰 종이는 언덕도 없이 평평해서 달리다 넘어지기 쉽다 넘어진 김에 긁힌 무릎으로 일기를 쓰다가 잠들 수 있다 이런 곳에 미로가 있어서 손가락을 물고 뚫어지게 쳐다보면 알밤처럼 무섭게 노려보는 곳이 있다 구겨서 내던지거나 찢을 수도 있지만 이미 눈동자가 감옥이다
살금살금 소리가 들려온다 내 귀는 주파수를 알아내려고 가운데로 모인다 산수풀떠들썩팔랑나비가 온갖 향기와 빛의 주인인 것처럼 더 깊숙한 처녀림으로 접어든다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숲을 기대할 수 있는 풍경이 있어서 나는 오솔길을 찾아다닌다 울음이 앙칼진 길고양이의 영역까지 침범하면 뒤돌아 나오고 뒤돌아 나오는 후회가 기본값이다
이곳은 엄마가 없어서 맘껏
걸어도 지평선은 멈추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백지가 도착한다 팔십 년을 걸어서 놀이의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들어가는 문이 있어서 들어가면 나가는 문을 만들어야 하는 목수가 되어 있다 방향이 없다 쌀 씻는 소리가 들리는데 저녁이 없다 창문이 보이는데 창문 안에 가정이 없다
나침반 이전의 들판에서 나는 사탕 몇 알 훔치다 붙잡힌 아이가 되어 손톱을 물어뜯는다 마디 없는 흰 손이 부끄러워서 눈을 내리깔지만 이미 설맹을 앓는다 뺨을 맞지도 않았는데 하얗게 질려서 가장 자신 있게 백기를 들어 올리고 싶다
이 네모의 링을 손수건처럼 흔들고 싶다
0도의 평면을 걸어 나오는 점이 보인다 나는 구조되는 중인가 이곳은 엄마가 없어서 나는 엄마가 아니다 나는 사방에 노출되어 있어서 어느 쪽으로 서 있어도 반성이 결말인데 0도의 평면을 걸어오는 점이 점점 홀쭉해진다 나에게 다가오는 홀쭉한 점이 내 발을 끌어당기려 해서 넘어질 것 같다 내 그림자 때문에 나는 뫼비우스의 띠로 여태 노는 중이다
출처 : 202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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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하영
당신의 눈 안에는
당신보다 오래된 별이 산다.
탄생 이전의 밤부터
그 빛은 조용히 당신을 비추어 왔다.
세상은 보이라고 펼쳐졌으나,
사실 당신은 비추기 위해 눈을 열었다.
빛은 바깥에서 들지 않는다
시의 샘, 그 안에서 피어난다.
사람들은 그 빛을 모르고
유리알을 가리켜 눈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건 오래된 불씨,
잊힌 사랑의 근원이다.
누군가를 다정히 바라볼 때
그 별은 깨어난다.
별이 깨어나는 순간,
당신의 시선은 치유가 되어
세상의 상처에 맑은 이름을 건넨다.
어쩌면 별은 하늘의 일이 아니다.
그건 당신 안에서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빛.
보고, 느끼고, 용서하는 호흡마다
그 별은 다시 타오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눈 속에서 우주를 본다.
밤이 더 깊을수록,
그 별은 더 맑은 빛으로
당신을 투명히 비춘다.
출처 : 2026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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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으니 : 그도세상 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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