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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정거장에서 부치는 서정의 편지 ― 진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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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35회 작성일 26-02-02 16:16

본문


존재의 정거장에서 부치는 서정의 편지 진혜진 시인

 

 

  깊이 있는 사유와 감각적인 언어로 우리 삶의 이면을 응시해 온 진혜진 시인을 시마을 이달의 초대시인으로 모십니다.

 

  진혜진 시인의 시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온 머묾과 떠남, 그리고 그 사이의 정거장 같은 순간들에 오래 머뭅니다. 그의 시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의 허망함,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경계의 시간을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길어 올립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자선시(自選詩) 사람정거장10편은 존재가 잠시 스쳐 가며 남기는 흔적과, 그 흔적을 견디는 시간의 윤리를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진혜진의 시 세계는 정거장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출발합니다. 시인에게 인간은 누군가의 목적지이면서도, 동시에 머물다 떠나가는 투명한 존재입니다. 사람정거장에서 드러나듯 그는 사라지는 한 사람의 여름과 지나가는 발자국을 견디는 그림자를 통해 인연의 유한함과 그 뒤에 남는 연민을 노래합니다.

 

  이러한 시선은 사물과 풍경으로 확장됩니다. 죽은 나무가 의자가 되어 다시 누군가를 품는 시간(물구나무로 만든 의자), 사랑과 미움이 겹쳐 투하되는 동백의 역설(소유) 등에서 삶의 비의와 아이러니를 날카롭고도 절제된 언어로 포착합니다. 그의 시는 과잉의 감정을 경계하며, 오히려 침묵과 여백 속에서 더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한편, 진혜진 시인은 우리나라의 척박한 문학환경에서 계간 상상인 발행인과 도서출판 상상인 대표를 맡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등 문학의 저변확대와 발전을 위하여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시마을 가족 여러분께서도 진혜진 시인이 안내하는 사람정거장에 잠시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이름 하나,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견디고 있는 그림자 하나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편들이 봄의 문턱인 2월에 조용한 위안과 사유의 여백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

 

람정거장 9

 

      진혜진 

 

 

 

새벽 종소리로 물든 몸의 정거장에서 한 사람의 여름이 사라지고 있다

 

한 올만 툭 잡아당겨도

스르르 흩어져 버리는 환일지라도

더 이상 비뚤어지는 계절이 없을 때까지 서로의 목적지가 될 때까지 모든 결말을 끌어안았지만 푸르스름한 빛 속으로

 

사라지고

 

한 사람이 두고 간 시간이 그림자로 남아

지나가는 모든 발자국을 견딘다

 

어깨 너머의 꿈은 당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연민이거나

멈추지 않고 지나간 연인의 이름이거나

의문이 많은 내일의 그림자

 

누구의 혀가 새벽의 체온을 더듬었을까

싱싱한 죄목들이 토해진 거리마다

팔딱거리는 그늘들

 

쓸만한 게 없어

 

함부로 던지는 눈빛을 밟고도

몰리는 무관심

사라지기 전 무엇을 하였는지

버려진 이름이 몇 개였는지

 

지켜봄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을 통과해야 하는 것을

 

누구도 모른다

 

 

 

 

구나무로 만든 의자

 

 

 

나의 물푸레나무가 죽어

의자 옆의 의자로 앉아 있다

 

내 나무는 물끄러미가 있던 우주의 방

 

후손은 먼먼 선사의 이름까지 의자로 만들어

자신들의 자리를 만든다

이 의자의 혈액은 진씨의 것인데

평산 신씨의 피가 더 진하다

 

뒷마당 가문비나무는 그늘을 접어

첼로의 옥타브를 만들었다

거문고가 된 오동나무의 무현*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수혈도 받지 않고 평산을 먼저 넘은 것은

누구의 울음이었을까

 

울음을 켜던 나의 왼손을 잊었는지

지워지는 얼굴들도 의자가 되어

잘 지내나 보다

돌고 도는 이름마다 의자가 되어

서로에게 앉는다

 

뭐해? 누군가 물으면

무얼 했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오늘같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내게 돌을 던진 자 없는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파문이 인다

 

당신이 그래,

당신도 그래,

 

사람의 견해가 변하지 않는다고

 

나의 물푸레의자가

물구나무의 평생을 바라본다

 

 

* 거문고의 여섯 번째 줄.

 

 

 

 

리의 목책공

 

 

 

머무릅시다

목책보다 더한 장벽으로

그때나 이때나 들어설 수 없는 장벽이 둘러쳐져 있으니

 

변할 게 없다는데 변한 게 많아 생각 없다는데 생각이 많아 닿을 수 없이 멀어진 거리입니다 지금은

 

함께 살기를 결의한 것이

함께 죽기를 각오한 것이 죽기 살기였습니다만

물과 바람과 태양이 출렁였으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이전과 이후가 휘날리는 이곳에서

기다림은 없고 무관한 이유만 가득한 이곳에서

알 듯 말 듯한 사람처럼

다 안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조금 전이나 오랜 후나 우리는 파란이 되고 파장이 될 것입니다

우주의 블랙홀보다 캄캄합니다만

불 꺼진 입간판만 가슴속에서 덜렁거립니다만

 

기다립시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브레이크 타임

오늘의 우리를 가장 많이 소비하게 된다 해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자본처럼 투하했지만

남는 봄이 있습니까

-소유

 

 

 

동백을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마지막 한 수

절벽이 사람을 붙들고 있습니다

 

비틀거리다 고개를 젓다

서로의 심장에서 동백이 흔들립니다

 

해체되소서 애증이여

가지면 가질수록 흉기 같아서
분해되어 흩어지면 동백의 거름이 될까 봐

 

사랑과 미움이 뭉친 동백이

투하됩니다

남은 얼굴이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의 착각을 사랑으로 투자했지만

소유가 되었습니까

 

빗발이 동백을 적십니다

이유가 다른 나도 흠뻑,

선운사는 피우고 동백은 흐릅니다

더 오롯한 풍경소리가 젖고 있지만

 

이제 와서 말인데요

내가 당신이니까 가져갔지요?

우리는 서로의 달인이 되지 못해

구기자를 달인 차를 마시다

가장 나답게

가장 당신답게

안녕 동백

 

가져도 가질 수 없습니다

 

 

 

 

갈이

 

 

 

머문다는 것은 앓이, 앓이는 흙의 몸을 바꾸는 갈이, 행운목이지요 이름은 누군가의 기대가 됩니다

 

나는 두 손의 배후가 되어 의식을 치르곤 합니다 그때나 이때나 흙은 거룩한 의식이 필요하지요 아버지를 뉘이고 흙을 다졌더랬어요 오래지 않아 식물의 냄새가 나더군요 조금 더 기다려보니 갈이로 꾹꾹 눌러 다진 흙에서 잔디가 피고 지고

 

흙에도 순서가 있어 죽은 자의 흔적이 일렁이기도 합니다 여기를 떠나고 싶은데 공기처럼 자유롭고 싶은데, 소망이 잘 스며들도록 마사토를 섞어 주었지요 분갈이로 한동안 행운목은 시들한 빛깔입니다

 

간절함이 바닥까지 닿아야겠습니다 오래전 몸을 뉘었던 흙의 느낌이 몸에 밴 듯 잠든 사람처럼 평온해집니다 우리는 하나의 행운에만 만족할 겁니다

 

그러니 잠시도 머물지 마시기를

 

 

 

 

12월의 상사화

 

 

 

종착역에서

또 다른 종착역을 가기 위해

 

기차가 다른 기차를 받아 하나가 된다

 

기차와 기차의 몸 같아서

사람의 사랑이 기차 같아서

 

햇빛을 가리는 손가락 틈새로 기다림은 찬란하고

기차가 기차에 매달려 떠나려 할 때

유실물 틈에 있던 오후가

흐르는 발자국으로 기차에 오른다

 

종착지를 내려놓은 동대구역

 

한 사람의 기다림을 안고

서울행 4호차 5A에 앉는다

 

철컥철컥 내달릴수록 펼쳐지는 지난 일들

 

역으로 가는 풍경을 바라보다

마음에도 역방향 의자가 있어

앉은 그리움이 도착지에 가까워질수록

기계 같아요 당신

 

종착역에서 기차는 다시 앞뒤를 바꿀 것이다

 

 

 

 

굴이 당도할 곳은 어디입니까

 

 

1

그리하여

살아있다는 것은 화장대의 거울 앞에서 파운데이션으로

그날의 전생을 덮어버리는 것

오늘의 화장은

한 사람의 예언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갈하고 비장해서 내게서 꽤 멀어지고 있는 얼굴

 

당도하려는 곳은 어디일까

 

2

살아있다는 것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한 사람의 화장을 기다리는 이 순간에도 숨 쉬고 있습니다

 

불타는 유리가 이마를 그은 11월과 핏빛 젤리피쉬를 끌어안은 12월 사이에서

미움의 흉터 같은 미안이 탑니다

살아있다는 것으로 벽제 불살을 막아설 수 있을지

 

옅은 화장 속으로 폭설이 잦아들 때

구른 것이 휠체어였는지 맹세였는지

멈춘 것이 바퀴였는지 사람이었는지

 

3

주먹을 쥐고 있는 동안

멀어지는 얼굴과 무너지는 얼굴을 오가며 서성이는 죽음이 다 타지 못해서

미련조차 미련에서 이제는 꽤 멀어져 가라고

 

화장을 하고

화장을 하는

 


 

 

제나 같은 크기의 어둠으로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때로는 사라진 뒤에야 선명해지는 관심이 필요하니까요

조명은 늦은 밤보다 깨진 꿈을 더 환하게 밝힙니다 달아날 핑계를 가져도 좋겠습니다

 

기척이 흐르지 않는 집에서

물 끓는 소리만 서성거립니다 결핍의 오브제 같습니다

 

어떤 징후는 발자국 소리에도 멈칫거리고 익숙함을 낯설게 합니다

누군가의 보폭을 따라가려면 후폭풍이 입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지만 괜찮을 겁니다

사라진 얼굴이 오래 남아 있는 밤이니까요

조명을 켜는 손이 많은 날에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적겠습니다

 

어느 날 완전하게 어둠이 사라진다고 해도 말입니다

 

 

 

 

견의 발생

 

 

 

오늘처럼

사람이 간결해질 땐

막연한 바람이 불어올 것 같아

빛이 저무는 왼쪽에서 오른쪽 그늘로 건너갈 거야

건너다보면 수소로 가득한 우리가 발생할 것 같아

입술에서부터 이별이 생겨나 둥둥 떠다닐 것 같아

 

왼쪽 가슴의 브로치에서 과거의 한낮이 쏟아진다 해도 폭풍몰이꾼이 모자에서 구두코까지 코사지를 달고 온다 해도

 

나의 왼쪽을 흔들어 깨우는 일

할 수 있겠니?

 

한쪽으로 치우치니까 사랑이 되고 더 치우치니까 미움이 되는데

 

세상에!

다시 갈라지고 있네

당신이 옳았군요

 

왼쪽의 바람이니 오랫동안 왼쪽에 갇혀있던 브로치의 혁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전복을 꿈꾸면 당신은 무차별적으로 사라질 것 같아

 

편견으로 세상이 열렸으니

여전히 눈부시게 우리가 꽂혔으니

이제 그만하자

 

당신을 완성하기 위해 눈을 감아야 한다고 했지

그동안 우린 눈을 뜬 빅뱅이었으니

서로를 편애했던 시간들이

다시 한 번 틀렸군요

 

 

 

 

니오 변

 

 

 

무엇이 절실한 한 마디입니까

변은 사방에서 패하고 돌아온 패잔병 같습니다

 

사람전쟁사람과 전쟁사람의 전쟁

떠난 자와 남은 자는 가깝게도 아프고 멀게도 아픕니다

 

말의 말보다

그냥 느끼시길……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올 풀린 스웨터 같은 변은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같습니다

 

몹시 피해적인 태풍 앞에서

몹시 사적인 몇 모금의 에스프레소가

카페에 앉은 나의 빈속을 관통합니다

 

간밤 태풍에 잠 못 드셨던 당신을 놓치고 나는 몰라서 나였어요누군가에게는 원통해서 나야그게 나입니다믿지 못해서

 

사람전쟁사람과 전쟁사람의 전쟁으로

죄송합니다

 

창밖의 스모킹 존에선 사람이 사람 속으로 연기가 연기 속으로 오해가 오해 속으로 매듭이 매듭 속으로

그러나 나는 내 밖으로

비는 비일 뿐 끝내 변하지 않고

 

무엇이 죄송한 변입니까

최후의 변은 침묵이라서

아니요 라고 뱉어낼 변의 목구멍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시인 약력]

 

진혜진

2016년 <경남신문>, <광주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 등

모던포엠작품상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계간 상상인·도서출판 상상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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