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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번지는 분홍의 긴장 — 양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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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59회 작성일 26-04-01 10:46

본문

[4월의 초대시인]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번지는 분홍의 긴장 양현주

 


  이번 달 시마을이 모신 초대시인은 시마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오면서 다양한 색채와 현대적 감각으로 독자적인 시적 영토를 구축해 온 양현주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개인의 내밀한 상처에서 출발해 사회적 비극과 현대인의 욕망까지 가로지르며, 주저없이 밀고 나가는 문장의 힘을 보여줍니다.

 

  양현주의 시적 궤적은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출발해 수용소의 철조망을 지나, 오늘의 전광판과 전자 화폐의 흐름까지 이어집니다. 사이프러스의 단내에서 그리움을, 몽돌의 각진 마음에서 존재의 숙명을 길어 올리는 그의 시선은 도발적이면서도 깊은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2014년 계간 시산맥으로 등단한 시인은 시집구름왕조실록을 통해 감각적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고전적 서정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의 사물과 현상을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시도는, 시가 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평을 보여줍니다.

 

  양현주 시의 핵심은 이미지의 전이에 있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와 해바라기의 상관관계에서는 예술적 고통을 현대의 고독으로 치환하고, 구름주에서는 구름의 움직임을 시장의 그래프로 연결하는 과감한 상상력을 선보입니다. 비속과 숭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존재의 변곡점을 포착해내는 힘이 돋보입니다.

 

  사소한 존재로부터 관계의 본질을 길어 올리는 힘 또한 인상적입니다. 몽돌의 작시법에서 둥글어지기 위해 물살을 견디는 돌의 시간은 곧 시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결핍을 슬픔에 머물게 하지 않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에너지로 전환하는 시적 근육을 보여줍니다.

 

  최근작 구름왕조실록감응에서는 부재하는 존재를 향한 기다림이 한층 맑은 결로 드러납니다. 텅 빈 자리에서도 등불을 켜두는 마음,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끝까지 응시하는 시선이 오래 남습니다. 양현주 시는 낮게 속삭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바라기의 불꽃처럼, 사이프러스의 향처럼 독자의 감각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초대시를 통해 우리는 상처를 무늬로 바꾸어가는 한 편의 치열한 연대기를 만나게 됩니다. 양현주 시인은 그 도발의 이면에서 가장 투명한 눈물을 지켜보는 조용한 목격자입니다.

 

  시마을 가족 여러분, 꽃가루처럼 가볍게 스며드는 봄날입니다. 양현주 시인의 시편들과 함께, 우리 삶의 가장 선명한 분홍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초대글 / 양현근 시마을 대표)

 

==================

 

이프러스 나무와 해바라기의 상관관계9

 

           양현주

 

 

  당신을 숨어 우는 바람이라고 부르자, 거세당한 외로움이 꺾인

  모가지가 그늘 쪽에서 한 권의 정물화가 되었어요

 

  빛을 쫓던 꽃은 갑이예요

  열다섯 해바라기가 방 안 가득 범람했지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왼쪽 밤이 누구에게나 있어요

 

  보낸 것도 아닌데 보낸 것처럼

  적막이 입 꼬리를 물고 뚝, 잘린 내 귀를 잡아당길 때 없는 귓바퀴가 젖어요

 

  친구가 떠나고 고개 숙인 작업실에 노란 태양을 들여놓았어요

  간헐적 안부가 끊어지고 매서운 나무들이 아를(Arles)에 가득했지요

 

  밤을 옭아매는 행위가 지금은 봄이라는 뜻

  복숭아꽃 쏟아지는 봄날 기껏 바람이 그리는 붓놀림이나 지켜보고 있자니 분홍 분홍한 입술에 기 빨리고 우두커니 혼자 바람에 꽂혀 있어요

 

  사이프러스 단내에 취해 나무가 있는 집으로 꽃이 들어서요 그것은, 해바라기 꽃말로

  당신을 부르는 행위

 

  구름 건너 밀밭 길 사무친 사이프러스

  점묘법으로 점...

  햇볕 알갱이처럼 찍고,

 

 

 

구름주

 

 

뜬구름이 구속 되었어요

하루가 파랗게 질렸지요

 

모가지 툭 떨구는 동백의 손절매는

리스크를 가늠할 수 없어요

 

당신을 보내고

스텝 바이 스텝*

 

후회의 방식이 욱신거려요

 

어젯밤 길게 자란 손톱이 날카로워

봉숭아물 한 그릇 떠놓고 손 모아

전광판을 색칠해요

 

뭉치의 내부는 달콤하고

구름의 뒷모습은 좇을수록 공허해요

상자 속에서 캔들의 변곡점을 찾아줄게요

 

당신 소식이 종일 오르락내리락 몸살 앓아도

e moneymoney가 되는 순간

포트폴리오에 빨갛게 익은

사과를 담아야지

 

우리의 내일을 예열할게요

기다려줄래요

 

종가에 민감한 구름의 오후 세 시를

매수하고 싶어요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

 

 

 

 

의 분홍

 

 

바람은 난해한 질문을 던지기 일쑤

 

가렵다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저기, 빛과 늪이 공존하는 아프리카 숲

어둠이 몸속에 박혀있는 기억을 뽑아낸 후 뾰족한

별 화살을 산란했다

한 바퀴 몰아친 의 회오리바람

 

절정에 든 야자나무는

탐스런 대낮에 그늘을 늘어뜨리고

꽃잎 소복한 저녁을 맞는다

 

사바나의 멋을 아는 코코넛에 심취했다면 그것은

온전히 야자나무 덕분이다

원숭이든 고릴라든

자아 자,

한번 오르면 쉽게 내려설 수 없는

 

나무의 기름진 등을

사랑하게 된다

 

이때, 모서리 없는 의 달그림자는 원의 숲 그늘마다

얼굴 빼꼼 내민다

 

위험천만 짐승들의 속내는

알 수가 없고

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생각만 데굴데굴 구르다 멈추는 동그란 구멍 속에

완성되는 로맨스

 

덜 채워진 초승달의 틈새로

무한대 가 일정 없는 시간을 풀고 개구멍을 빠져나온

 

노란 달이 웅크려 달, 달달

길을 밝힌다

 

의 도발처럼




홀로코스트

 

 

  안개가 철조망에 툭, 걸려있어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갇힌 머리꼭지를 따며 불볕을 훔치는 손아귀가 서늘해요 한 줄로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풀 죽은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요 한여름 피땀을 뒤집어쓴 엄마 이마를 쓱 만져주고 싶어요 수용소 밖으로 삐져나온 목쉰 소리가 아우성쳐요 안개를 먹어 웃자란 꿈, 머리채가 뽑혀요 뜨거운 빛깔로 키를 늘이는 시간, 운동장을 나란히 걸으며 그들은 천천히 죽는 공부를 해요 안녕, 학교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요 군인은 빗소리같이 털털한 친구들을 몰고 막사에 검은 구름을 초대했어요 곧 시뮬레이션 게임의 시간이에요 우리는 욕실에서 샤워하듯 청춘을 벗어요 푸른 옷을 벗자 붉게 더 붉게 느린 걸음으로 저린 시간들이 쏟아져요 소싯적 친구들이 지워지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는 건조기가 우리들의 지혜를 쪼글쪼글 말려요

 

  난 정말 죽은 걸까요

 

  화장실에 숨어 변기시트가 엉덩이를 다 파먹도록 탈무드를 읽어요 왈칵, 변기물이 넘쳐요 내 몸의 물을 빼앗긴 나는 미치도록 허기져요 부스러진 나치의 문양 같은 검붉은 쇳가루가 수북이 쌓여요

 

 

 

 

변검

 

 

  잘 있니, 평범한 안부가 뼈저려요.

 

  사과나무 열매는 여전히 실해요, 답하고 나면 정작 당신의 기억은 금세 잘렸어요. 태풍에 날아가는 뿌리의 팔을 붙잡고 계절은 지난 생각들로 울울창창했지요. 흙을 끌어안은 채 풋사과의 시절을 잊었어요. 곧은 우듬지를 넣은 시계를 꺼요.

 

  고목은 영원한 노스탤지어(Nostalgia)

 

  부지런한 잎사귀의 기도와 Y집에 떠 놓은 까치밥 한 그릇, 나무의 온기를 오래 곁에 두고 싶었어요. 구부러진 허리로 붉은 치맛자락을 베어 문 겨울이 걸어와요. 엄마, 엄마가 바뀌는 환절기가 있어요. 나무의 핏줄은 절박한 표정으로 생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어요. 혈색 좋은 잎맥을 발라먹고 싶어요. 당신의 계절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저물녘, 엄마의 얼굴을 내가 바꾸어 쓰고 있네요.

 

 

 

돌의 작시법

 


  푸른 절벽을 당신께 전송합니다, 수락해 주실래요?

 

  모난 저를 보내며 바닷가에서 만난 몽돌이 생각났어요 종일 몽돌이 짠물을 호명하며 요동쳤지요 도시로 떠난 조약돌 행방이 묘연했어요 서랍 속 그늘을 베고 잠들었을까? 빈터에 꽃으로 피어났을까? 폭염은 제 몸에 새겨진 스키테일 암호를 풀면서 시작되었지요 십여 년이 흘러도 닳지 않던 위험한 돌기突起, 남몰래 몽돌을 닮고 싶은 저는 둥글지 못한 심석心石을 버리지도 취하지도 못해 끝내 무명이 되었지요

 

  천 년을 구르려면 마음의 윤기가 중요하다고요

 

  환장할, 우리는 그들과 다르잖아요*

 

  누군가와 다르기 위해 몸에 새긴 파도의 꽃말 따윈 버려야겠지요 제 몸으로 시를 쓰는 일의 처음은 구김살 없이 자란 햇살이 스미던 그 시절, 서늘한 달이 해를 품는 일처럼 제 몸에 푸른 상처를 긋고 암석暗石이 되곤 했지요 저는 태고의 각진 마음을 갖고 이름 없는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오랜 경력의 바다를 멘토로 모셨어요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모두 죄뿐이라서 밀물이 가르칠 때 한 발자국 물러나 침묵을 배웠던,

 

  당신을 통독하며 반질한 제가 되어가요 당신은 때론 자신도 해독 못 하는 그리움, 저를 지상으로 꺼내놓았던 물의 암호를 주었어요

 

  전송한 가파른 절벽을 당신이 물살의 언어로 더듬는 동안, 당신은 푸른 이끼를 벗고 해안선 가득 둥근 언어를 풀겠지요 하지만 수줍어, 저는 여전히 낯선 동그라미예요. 당신께,

 

*우리는 그들과 다르잖아요 : 화양연화 영화 대사.

 




 자작나무 당신

 

 

상처 많은 나무에 대하여 생각한다

 

오랜 세월 지나오면서 할쑥해진 얼굴나무가 지닌

슬픔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풀고 있다

 

녹슨 기찻길 너머 먼 곳에 길을 내는 구름의 마음을

당신은 어쩌지

 

정거장을 만드는 손

나뭇가지를 붙잡고 내 몸은 시리도록 하얗다

 

속 검은 수액의 눈물을 하나씩 벗겨낸다

떨어진 기온이 햇볕에 밀려 숲을 태우는 소리

자작자작 들려주고 싶다

 

내 생애 이토록 하얗게 질리는 아찔함이 또 있을까

 

낡은 책 속에서 뜯어낸 마른 갈잎

뇌세포 하나하나가 나무 한 그루를 깊이 떠올렸다

 

당신 목소리 우두둑 내 귓가에 들렸다

 

 

 

불가촉 연인

 

 

  어깨를 기댈수록 나비의 숨결은 선명해졌다 마음이 짧아지는 것은 나도 원하지 않아사랑이든 이별이든 뇌에 가까워질수록 꽃은 키가 낮아진다 내려놓지 못한 통증이 서로 껴안고 울고 마음 깊이 사랑한다이 말은 낡은 유물처럼 건조하고 싱겁다 꽃과 마주 앉아 그림자를 늘이고 싶을 때가 있다 달에서 멀어질 때겨울 보내고 봄을 잊은 척 또는 별이 그리운 듯 봄볕으로부터 현실이 해체된 날 꿈을 내려놓다가 문득날아가는 손을 자석처럼 잡아끄는,

 

  증명할 수 없는 바람의 철분들

 

  라일락은 가슴에서 피어 숭어처럼 뛰어 오른다 당신에게푹 빠져본다 쏟아지는 무리별을 조금 떼어 붙이고 달의 심장을 오려 온통 당신에게로 사라졌다 피고 되살아나기를 여러 해 미안꽃이 아니었다 봄이 열리던 그 순간 나비가 없다 달의 심장을 접붙이는 것이 오랜 숙원이었으나 한 시절 뛰었던 가슴은 나무가 꽃을 사랑할 때 막무가내 덜컹거렸던 봄의 서곡을 느리게 빠져나간다 레코드판이 펼쳐내는 봄

 

  당신은 내게서 여전히 꽃 지지 않아,

 

  묵언의 푸른 몸을 입증하려는 듯 그대환한 날에 나비로 날아들겠다 꽃잎도 사뿐히 책갈피에 눕고자 허공에 잎 떨구겠다

 




구름왕조실록

 

 

  그녀가 곁을 앓는다

  왕은 떠나가고 구름은 텅 비어있다

 

  왕이 구름 속의 자오선을 지나는 찰나그늘에 앉아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구름을 닦고 답 없는 사각의 벽을 쇠망치로 뚫다가 햇빛 모서리를 사각사각 깎아 먹은 적도 있다 맛있었다

 

  여름 한낮 왕의 그림자를 폭식한 웃음

  거동이 미쁘다

  구름 속에 들어도 왕은 없고

  발걸음만 뜨겁다

  혼자 뜨거운 저쪽꽃 덩굴이 한 올 풀렸다

  담벼락을 넘어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하루

 

  그녀는왕의 하루를 500킬로 헤르츠(주파수로 설정해 놓았다

 

  행여 길을 잃을까 담장 밖으로

  문을 낸 안부

 

  구중궁궐九重宮闕 분홍 기다림을 풀어놓은 저녁

  열두 폭 주홍치마 두른 나팔

  배시시 웃을 때

 

  저기심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

  꽃등을 켜는

  능소화

 

  왕은 부재중이므로 나는 그 곁을 꽃이라 부른다

 

 

 

 

감응

 

 

평행하지 않은 수평선갈기를 접은 돛은

불안이 먼저 읽는다

무언가에 닿지 않아도 닿은 꽃살문

쉬이 물길이 열리고

닫혀도

 

선착장에 들어온 저인망은

여전히 중심이 무겁다

 

저문 모래알의 입을 읽고 있는 트롤선의 응시

해를 향해 어떤 묵시를 보냈을까

눈으로 잴 수 없는

수심

 

어깨를 이울고 있는 바다가

불면을 뒤척이며 왼쪽 등대를 켠다

달의 페이지를 넘기며 흐릿한 운무 사이로

뱃머리 중심 갸우뚱 떠있다

 

===============

[양현주 시인 약력]

 

2003년 평화주제 문학 작품 공모전 입상

2004스토리문학올해의 작품상 수상

2014년 계간시산맥으로 등단

시집 구름왕조실록

2018스토리문학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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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오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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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해바라기의 화려한 색채 속에 숨겨진 고흐의 지독한 외로움과 상처가 섬세한 시선으로 잘 형상화된 것 같습니다. 강렬한 빛과 어두운 밤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흐의 삶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문장들이 무척 인상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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