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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알, 선우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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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432회 작성일 24-05-2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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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알, 선우경식(鮮宇景植)-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서울신문


언젠가는 가 보고 싶었다.
무료병원(無料病院)이라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무료로 병원을 운영한다는 말인가.
무료도 궁금했지만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봄비가 내리는 평일 오후, 영등포의 골목을 누비며 ‘요셉의원’을 찾았다.
교차로 옆 허름한 골목에 나지막한 의원이 보이자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총선 결과에 대한 해석과 전망을 써 놓았지만, 원을 구성하기도 전에 싸움을 위한 준비로 불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을 바꿨다.
아니, 봄비가 마음을 바꾸게 했는지도 모른다.
산골짜기 넓은 밭에 호밀을 파종해 놓았는데, 봄비에 하나의 낱알도 헛되지 않고 새싹들을 틔우고 있었다.
그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밀알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계속 맴돌았다.

무료병원이라는 무모한 꿈을 꾼 사람은 선우경식(鮮宇景植; 1945~2008, 平壤)이라는 청년 의사였다.
그는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성모병원에서 수련을 거치며 생각에 빠지곤 했다.
응급환자들이 돈 없으면 치료는커녕 진료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미국에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무치료 제도가 있어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미국으로 갔다.
뉴욕의 킹스브룩병원에서 2년 근무한 그는 대학병원의 부교수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른다섯 살의 잘생긴 아들에게 어머니는 맞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의사 사모님을 기대하며 나온 여성들은 돈 버는 의사가 되기는 싫다며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며 느낀 고민을 이야기하는 선우경식과 인연이 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평생 미혼(未婚)으로 살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가 결심을 굳힌 것은 강원도 정선의 성프란시스코의원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던 때였다.
환자들이 돈 없는 것은 기본이었는데, 수녀(修女)와 봉사자(奉仕者)들이 해맑은 웃음으로 그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가난 때문에 죽어 가는 환자들을 위해 살겠노라고 이때 그는 결심했다.
“가장 능력 없는 환자가 하느님이 내게 보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그는 변해 가고 있었다.

십시일반으로 병원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석 달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라는 걱정이 다수였지만, 그가 세운 ‘요셉의원’은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작년 말까지 이곳을 찾아 치료받은 환자가 75만명.
하루에 많게는 90명 적게는 60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았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모든 진료와 치료를 무료로 해 준다.
그래서 ‘요셉의원’은 전국구 의원(全國區 醫院)이다.
노숙인, 행려자, 쪽방촌 사람들이 전국에서 오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제(司祭)의 길을 걷는 신학교 학생들이 현장실습으로 도우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사무실 안쪽 루이제 수녀에게 안내했다.
무료병원으로 자라난 요셉의원이 이제 봉사자 1,200명, 의료진 260명으로 19개의 진료과를 꾸려 환자들을 돌본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루이제 수녀에게 물어보았다.
“좋은 일을 하다가도 우리는 지치잖아요.
어떤 때가 제일 힘드신가요?”

수녀는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우리는 기쁨을 얻습니다.
봉사를 나오시는 의사들을 보면 그분들뿐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기뻐하고 칭송해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는 걸요”라며 웃었다.

“그분은 성인이었어요, 예수님과 같이 사셨어요.
이 책은 제 몫으로 받은 건데 선물로 드릴게요.”
수녀가 내민 책은 ‘쪽방촌의 성자, 의사 선우경식’이라는 책이었다.
요셉의원의 초대 원장이었던 선우경식 선생 16주기를 맞아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글들을 엮은 것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21년간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며 ‘무료병원’이라는 씨앗을 심고 가꾸던 선우경식은 16년 전 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4월 18일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싹을 틔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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