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한 꽃 / 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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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한 꽃
강미정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을 보러갔다
꽃나무는 눈을 내리감고 제 발등에 펼쳐진 고요를 보고 있었다
한걸음 꽃그늘을 딛을 때마다 붉은 연기처럼 고요가 피었다가 사그라졌다
꽃을 밟고는 못 건너가겠다고 딸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꽃송이를 하나하나 주워 올린다
꽃을 올린 두 손바닥은 오므린 꽃잎이 막 벌어지는 꽃 한 송이
향기가 손금을 따라 붉게 번지다가 고인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나의 시간이 고요 속에 앉고
바닥도 없이 층층이 바닥이었던 나의 붉은 시간도 피었다
웃음도 뎅컹, 울음도 뎅컹,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송이를 주워들고
눈부신 바닥의 암흑만을 내가 물려받아 딸에게 물려준 것일까
밟을 수 없는 꽃송이 하나하나 나란히 줄 세우고 붉게 내린 고요를 건너오는 딸
눈앞엔 바닥이 없는 붉은 고요만 가득하다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 등단
시집으로 『타오르는 생』 『물 속 마을 』
『그 사이에 대해서 생각할 때』 『상처가 스민다는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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