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감 /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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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감(未視感, jamais vu)*
오 은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울며불며 매달린다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없던 법이 생기던 순간,
몸이 무너졌다
마음이 무너졌다
폭삭
억장이 무너졌다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처럼 한결같이 서툴렀다
사람이 사람을 에워싼다
둘러싸는 사람과 둘러싸이는 사람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어색해한다
사람인데 사람인 게 어색하다
여기서 울던 사람이
길에 매달려 가까스로 걷는다
집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안녕
어떤 말들은 안녕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속이 상한 것은
겉은 멀쩡하기 위한 거지
겨우내 겨우 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봄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푹푹 꺼지는 땅 위에 사람이 서 있다
여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을 겁니다
*기시감(旣視感, dèjà vu)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실제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경험하는 듯이 느끼는 기억 착각을 의미한다.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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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깊으면멋님의 댓글

반어법을 사용하여 드러낸 사람의 사람에 대한 상실감
없던 법이 생기는 순간,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 이로 인해 무너졌다.
사람이 같은 사람에 대한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들러싸는 사람과 둘러싸인 사람이, 서로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서로가 같은 사람인데, 사람이어서 서로가 어색하다.
어떤 말들은 안녕하지 않아도 안녕이라 할 수 있다.
속이 상한 것은 겉이라도 멀쩡하기 위함이다.
겨우내 겨우 내가 되었는데, 봄은 여전히 얼어불어 오지 않고,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게 해주는 게 땅인데, 이마저 푹푹 꺼져 서 있을 수가 없다.
분명 나는 여기에 속하다고 여기는데, 여기에는 속하지 않는다.
필경 이런 누군가가 어디에 있을 것이다.
조분 조분하게 웅얼거리는 듯한 독백의 자조가 오히려 강한 독설로 폐부를 찌르며 들어온다.
202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