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 =양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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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양안다
잠에 들지. 눈이 붓지. 꿈에서까지 나의 친애하는 우울을 나눌 필요는 없으니. 숲과 불과 재와 연기가 떠오르는 새벽입니다. 나의 머리통을 불태워줘. 물론 꿈속에서요. 어린 내가 친구들과 함께 흩어지는데요. 계속해서 속아 넘어지겠습니다. 그때 나의 마음 누가 훔쳐갔는지. 혹시 그건 나의 매혹 아니었는지. 그러나 새벽은 저녁의 또 다른 이름이자 황홀이었다. 나는 아직도 꿈에서 그네를 타고 정글짐 오르며 발을 구르고 있다. 미안,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 그랬어. 선생님, 삶은 불평등해요. 그러나 죽음은 평등하고 같은 모양의 무덤을 갖고 공중묘원에서 나는 두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맞아요. 아직 섣부르고 어린 피입니다. 달은 어둠을 불러모읍니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삐져나온 두 발을 의식하며 차가운 칼날을 상상하다가........천사가 와서 입을 맞춰주겠지요. 부끄러워 얼굴을 가렸어요. 잠들기 전마다 취한 상태고 말릴 사람이 없죠. 속도가 자꾸 불어요. 상처 아문 자리를 긁고 또 긁으며 새 상처를 만들고 내가 도움을 요청했나요? 네, 안 했다면 다행이네요. 나의 장례식에서 아무도 울지 말아요. 그러지 마. 위선적이니까. 물론 나는 죽지 않아요. 분노가 흔들거리니까 내가 흔들거리며 걷는다. 어린 내가 꿈의 그네를 타는데, 달은 외눈이었고 양초는 외마음이었다. 우울은 비웃음 괜찮아요. 나는 이분법을 다 버렸다. 애정과 증오가, 사랑과 살의가 하나의 마음이라는 걸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 그리고 잠에 들지. 눈이 붓는데. 친구들, 미안합니다. 내가 이런 망상에 휩싸여도 날 미워하지 말아요. 임산부의 눈동자에도 태아의 눈동자가 깃들어 있다는 걸 믿겠습니다. 나의 친애하는 우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소문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슬픔을 만들어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내가 울었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학동네시인선 186 양안다 시집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030-032p
얼띤感想文
잠에 드는 것은 곧 무대에 등장한다는 뜻과 같다. 눈이 붓는 것은 긴 잠에서 풀려난 것이겠다. 누군가 읽고 있다는 말과 같다. 꿈에서까지, 그러니까 시 객체가 갖는 상상의 세계다. 나의 친애하는 우울은 우물 같은 울림으로 시 주체를 비유한다. 숲과 불과 재와 연기는 우울에서 변형된 어떤 한 형태들이며 이는 하나의 새벽을 이룬다. 그러니까 새벽은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알리는 장이며 여기서 말한즉슨 시제 ‘퇴원頹垣’처럼 무너진 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어인 셈이다. 나의 머리통을 불태워줘. 이를 우울에서 피어난 불꽃이라 해두자. 어린 내가 친구들과 함께 흩어지는데요. 그렇다. 인식은 언제나 흐릿한 안개를 몰며 어렴풋이 다가오니까 그 단계를 시인은 어린 것으로 치부하고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그때 나의 마음 누가 훔쳐 갔는지. 혹시 그건 나의 매혹 아니었는지. 시의 自畵自讚이다. 새벽은 저녁의 또 다른 이름이자 황홀이었다. 새벽은 아침의 전 단계며 저녁은 죽음의 전 단계다. 그러므로 새벽은 언제나 황홀로 다가온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물론 꽃을 보고자 갔으니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일단 불꽃이 일어야 하고 이는 꽃으로 전환하느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나는 아직도 꿈에서 그네를 탄다. 정글짐 오르며 발을 구른다. 이러한 표현은 시 객체와의 교감이다. 김이듬 시인은 ‘날씨가 교배종 풍란과 연결된 방식’이라 표현한 적도 있었다. 선생님, 삶은 불평등해요. 죽음은 평등하고 같은 모양의 무덤을 갖고 공중 묘원에서 나는 두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시에서 삶이란 지면에서 피는 모든 상상이다. 이러한 상상은 사람마다 다름으로 불평등이며 죽음은 지면에 닿은 것 즉 그것이 어떤 죽음인지 여기서는 분간할 필요는 없다. 단지 무엇을 묻은 것은 매 한 가지니까. 공중 묘원이란 표현 참 재밌게 쓴 시어다. 너와 내가 만난 곳 근원을 근원에서 나를 잃어가는 과정은 시 인식의 단계다. 아직 섣부르고 어린 피다. 피 혈血이 아니라 피 피皮로 지면을 상징한다. 달은 이상향이며 시 주체를 상징하며 어둠은 시 객체를 상징한다. 이불은 두 부처의 二佛로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얼추 비슷하게 혹은 인정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며 두 발을 의식하며 차가운 칼날을 상상했다는 말은 과연 부처로 환생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두고 내심 고민하는 장면이다. 천사는 글을 잘 아는 비평가나 동인을 비유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가렸다.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내 글에 대한 자신감 그것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시라는 것은 이상한 문자임은 틀림이 없고 이러한 놀이방식도 시인만 갖는 특별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속도는 속도速度가 아니라 속도屬島다. 큰 땅에 붙은 아니 딸린 섬처럼 부연설명과 덧붙임으로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한 장의 머리통을 형성한다. 나의 장례식에서 아무도 울지 말아요. 그러지 마, 위선적이니까. 장례식은 글의 마침을 상징했다면 위선적이라는 말 이는 시처럼 보이지만 속은 다르다는 어떤 이중적인 잣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달은 늘 외눈처럼 짝을 이룰 수 없고 양초는 언제나 마음의 바깥이었다. 그러니까 묘사와 상징 비유와 진술에서 새벽과 저녁을 오가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는 시의 이분법적 논리에 부합하는 일이며 기이하거나 어떤 전설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곳은 사랑과 살의가 오가며 임산부의 눈동자처럼 저녁을 몰기도 하고 새벽을 허물며 아침을 맞기도 한다. 그러는 과정에 태아의 눈동자는 어느새 깃들 것이며 우울은 우울만의 일이 아니라 슬픔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시선은 장맛에 이르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니까 이는 퇴원이라 해도 되겠다. 창문 하나를 두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면서 말이다.
그나저나 오늘 달은 폭락했으며 소고기는 원 없이 먹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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