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항아리 =이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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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항아리
=이운진
빈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저녁을 굶은 아이와 젖이 마른 엄마가 부둥켜안은 것처럼 둥근
새벽에 울려 퍼지는 수도원의 종소리처럼 둥근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운명이 없는 눈송이들이 항아리에 담긴다
가장 멀리서 가장 깨끗하게 온 것들을 담아
어떻게 이토록 자기의 가슴을 슬프게 만들 수 있는지
빈 항아리는 차곡차곡 눈을 쌓는다
슬픔을 발효시키려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듯
둥근 자세를 바꾸지 않고
모든 기도를 다 드린 마음처럼 둥글게
항아리는 비어 있다
시작시인선 0185 이운진 시집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87p
얼띤感想文
시가 운이 있다. 읽는 맛이 다분하다. 내린다, 내린다, 담긴다, 쌓는다, 이것이 각운이라면 시의 맨 끝 행에서 오는 감은 좀 아쉽게 읽힌다. 가령 항아리는 비어 있다, 보다는 비워 놓는다, 하며 끝맺는 것은 어떨까! 감상하는 마당에 시를 흠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독자의 마음이다. 항아리는 위아래가 좁고 배가 부른 질그릇이다. 그렇다. 대표적인 물건으로 똥장군을 들 수 있겠다. 항아리는 한자 항아리 항缸에 우리말 접미사 아리가 붙은 단어다. 여기서 항아리는 무엇을 담는 역할로 빈 항아리와 대조를 이룬다. 그러니까 항아리는 시적 주체가 되고 빈 항아리는 시적 객체다. 저녁을 굶은 아이와 젖이 마른 엄마가 부둥켜안은 것처럼 둥근, 시를 갈구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여기서 ‘둥근’은 시의 맥락을 살피기 위한 시적 보조 장치다. 가령 10행에 보면 둥근 자세를 바꾸지 않고, 이는 시적 주체의 마음임으로 시의 견고성을 대변하고 그러므로 12행에 항아리는 비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비워 놓는다고 표현해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각운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놓는다는 것에 점하나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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