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 =오병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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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4회 작성일 24-07-15 19:56본문
미란
=오병량
우물을 매단 그물이구나, 거미의 입으로 짓는 것은
고인 침을 삼키며 독을 내리는 밤
그네를 밀 때마다 떠가는 애인의 둥근 엉덩이가 있다
협곡이라면 뛰어 건너고 싶고 끝끝내 빠져 죽을 절벽
그 사이를 말하자면 달빛을 걷는 애인은 멀리
더 멀리라고 외치는 장난만 같다
두 손만 쉬이 물들이는 웅덩이 둘
깊게 파인 나라로 애인은 잠시 떠나고 자꾸만 돌아온다
앞섶에 피워내는 젖내 기대면 달아나는 저 짙은 숨에 안겨
토끼의 귀는 길고 속이 붉은가
헛것을 밝히는 별 아래 계수나무 잎사귀 하나, 하늘
하늘 치마폭에 내려앉아 애인의 지친 무릎을 적시고 있다
서늘한 손가락 끝에 꼭꼭 숨은 아이들만 보인다는
머리칼을 몸소 늘어뜨린 애인의 뒤통수가 유난히 검고
높이 솟은 얼굴만이 달빛으로 밝다
커다란 분화구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결국
믿다가 버려두는 의심에게
관성(慣性), 그 포기를 밀쳐내는 힘
입술을 맞댄 순간조차 내내 그리울 얼굴이었다
문학동네시인선 212 오병량 시집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얼띤感想文
이 시를 읽으며 한마디로 “캬”. 책은 진절머리가 나지만, 가끔 좋은 시를 읽으면 아! 다시 또 내봐, 하며 이런 생각이 든다. 시제 ‘미란’은 특별한 의미를 부가하지 않아도 시 읽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냥 심심하여 네이버 국어사전을 열어보니 썩거나 헐어서 문드러진 것을 미란(糜爛,靡爛)이라 한다. 우물을 매단 그물에서 우물과 그물은 서로 대립한다. 그러니까 시 주체와 시 객체다. 거미의 입과 독을 내리는 밤은 고인 침하고는 상반되며 둥근 엉덩이가 한쪽이면 그네를 미는 주체는 시다. 협곡과 절벽은 시 객체를 묘사하며 그만큼 평탄치 않다는 단증이다. 단어 선택에 참 탁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협곡과 절벽은 보편적으로 보면 여자를 상징하기도 해서, 그 사이를 말하자면 달빛을 걷는 애인은 멀리 더 멀리라고 외치는 장난만 같다. 달빛은 시적 주체며 글과 마치 사랑을 나누듯 약간의 장난기 어린 이미지가 떠오르고 두 손만 쉬이 물들이는 웅덩이 둘. 웃음이 일었다. 하기야 이쪽도 저쪽도 웅덩이기는 마찬가지. 마음의 웅덩이니까. 깊게 파인 나라로 애인은 잠시 떠나고 자꾸만 돌아온다. 호호! 깊게 파인 나라 마치 칼처럼 밀크바 먹는 재미, 거기에다가 뺑뺑 아까 담갔던 손은 다시 돌아온다. 앞섶에 피워내는 젖내 기대면 달아나는 저 짙은 숨에 안겨, 갑과 을이다. 어찌해서든 키워보겠다고 살려야 한다며 토끼의 귀는 길고 속이 붉은가, 홍대다. 후다닥 같은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토끼라는 시어는 참 재밌다. 무슨 뜻인지 몰라 깊숙이 박는 저 귀를 보면 사정은 지루하겠다. 헛것을 밝히는 별 아래 계수나무 잎사귀 하나, 별과 계수나무 잎사귀는 대치다. 아까 달빛과 토끼 같은 시어가 있었으니까 별과 계수나무라는 시어는 당연지사다. 하늘 치마폭에 내려앉아 애인의 지친 무릎을 적시고 있다. 무릎은 관절 부위다. 뼈와 뼈를 연결한다. 뼈가 고딕이며 시의 고체성을 대변한다고 하면 무릎은 그 일의 과정에 있어 어떤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서늘한 손가락 끝과 숨은 아이는 상호 대립하고 머리칼과 뒤통수는 검정을 상징한다. 높이 솟은 얼굴만이 달빛으로 밝다 시적 의인화, 커다란 분화구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결국 믿다가 버려두는 의심에 관성, 그 포기를 밀쳐내는 힘 입술을 맞댄 순간조차 내내 그리울 얼굴이었다. 그럴 것 같다. 내내 깜깜하게 있다가 모처럼 만난 털복숭아처럼 맛있게 먹는 저녁은 언제나 그립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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